기억 속 완벽했던 순간
어제 밤늦게 부고를 보냈고 내일 발인이기에 조문이 가능한 날은 오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꽤나 정신없는 하루가 예상되었다. 난 어제 미처 부고를 보내지 못한 분들에게 소식을 알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 중에는 소원해진지가 꽤 되어서 ‘이 사람에게 소식을 알리는 게 맞나..’ 싶었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부고는 최대한 알리는 게 도리라 생각되어, 결국 아무런 판단 없이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실 무엇보다 보낼지 말지를 가늠하기 위한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오랜만에 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한 문장이 고마웠다. 형식적인 말이라도 해야 할 때 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지인들에게도 소식을 알려야 했다. 아버지 핸드폰에는 따로 비밀번호가 설정되어있지 않아 내가 직접 아버지 핸드폰의 카톡에 들어가 아버지의 지인들에게 소식을 알릴 수 있었다. 아들이라 인사를 먼저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경황이 없는 것을 이해해 주실 것이라 생각해 부고에 대한 내용만 적었다. 너무 오랜 기간 아프셨기 때문일까. 참여하고 계셨던 카톡방도,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도 그리 많지 않아서 소식을 전하는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핸드폰으로 답장이 왔다.
'정말 고생 많았네.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게 나의 친구여.'
수차례 성함을 들어 알고 있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던 정든 친구들과 사회생활을 하며 생긴 소중한 인연들이 있다. 언젠간 시간이 지나면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필연적으로 이별해야 할 사람들. 그때가 오면, 내가 아버지를 보내는 지금처럼, 그들과 같이 행복해하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바랜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갈 것 같다.
처음 알게 되어 통성명을 하는 순간, 동네 길거리를 뛰어놀던 순간, 파란만장한 청춘의 시절, 서로의 결혼식에서 사진을 찍었던 순간, 앉아있는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으며 넌 망했다며 아이의 출산을 축하했던 순간, 성인이 된 아들 딸이 대학에 합격해서 이제 다 키웠다며 기뻐했던 순간, 서로의 부모님을 보내며 눈물을 터뜨리며 가슴 아파했던 순간. 다 키워낸 아이들의 결혼식에선 얼마나 행복한 웃음을 띠고 있을까.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소중한 나의 일부가 되어버려서 이별을 해야 하는 순간의 눈물엔 슬픔만 담겨있지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 역시 그때가 오면, 문자를 보낸 아버지의 친구분처럼 그들에게 만감을 담아.
“정말 고생 많았고,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게”
라고 말해 줄 것 같다.
조금 시간이 지나 점심시간이 되니 조문객들이 하나둘 도착하시기 시작했다. 역시 평일 이른 시간이다 보니 주로 아버지의 지인 분들이 먼저 도착하셨다. 나는 조문객들을 맞으며 머릿속으로 에너지를 배분할 스케줄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점심 전후 아버지의 지인 분들에게 에너지를 조금 쓸 것 같고, 아마 4-6시경에는 조금 뜸할 것 같으니 쉬다가, 7시 이후 나의 지인들이 오면 그때 모두 쏟아부어야 할 것 같군. 역시 난 분석적이야’
하지만 언제 일이 계획대로 되었던가. 아버지가 사회생활을 제대로 안 하신 지 25년 정도가 되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다. 30년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의 후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었던 어르신도 조문객으로 오셨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들을 이야기하시기 시작했다. 그분들이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기억은 내가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해 주었고, 가족과 주변 사람을 아끼는 인간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아버지는 전세금을 마련해 주거나, 비싼 신혼 가전을 사주시거나, 자녀의 학비를 대주시거나, 사정이 어려운 지인들이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지출을 본인이 나서서 도와주는데 전혀 아까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집을 사주지 못하고 전세로 마련해 주어서 안타까워하셨다고 한다. 스케일이 참 남달랐나 보다. 그분들은 아버지를 소중한 은인으로 생각해 주셨고 나의 결혼식에도 찾아와 큰 금액의 축의봉투를 넣어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누구냐며 정체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정작 아버지 본인은 도와준 기억을 떠올리는데 한참이 걸렸던 것이다.
결혼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내 결혼식 몇 달 전부터 아버지는 동문회의 테니스 모임을 나가기 시작하셨다. 당신은 몸이 불편해 집에서 오랜 시간 두문분출하였지만 내 결혼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주시길 바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친구들을 만나며 잠시나마 지인들과의 관계를 유지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가 아버지가 근래 가장 건강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분들과 나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다.
“… 원래 좀 지병이 있으셨나요..??”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56년생이고 68세 이셨다. 돌아가시기엔 조금 이른 연세이시니 무엇인가 원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분들 입장에서도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을 보내는 순간이 아니던가.
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숨기지 않고 그대로를 말씀드렸다. 그럴 때마다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닦으며 담담하게 말씀드렸다. 그리고 그분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조용히 충분하게 기다려 드렸다. 옆에서 와이프는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도 너무 힘들고 듣는 사람도 마음이 쓰이니 그냥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가셨다고 말하는 게 어떻냐고 했다. 알겠노라 했지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짧은 필력으로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건 마치 내가 해야 할 의무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그냥 단순히 자연스럽게 돌아가셨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오랜 기간 원인 모를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으셨고, 어머니 역시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병세가 나아지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생각하고 계셨다. 남은 시간 동안 본인과 가족이 더 힘들거라 생각하셔서 모두를 위한 결정을 본인이 했을 수도 있다. 물론 아버지 당신만이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어찌 그냥 돌아가셨다 말할 수 있을까.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무엇인가를 부정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난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사실을 이야기해 내었다. 이런 걸 고집했던 걸 보면 나도 참 독한 인간이다.
아버지가 건강하던 시절 우리 가족은 여행을 참 많이 갔다. 아버지는 회사 일로 가족과 일상을 많이 보내진 못했지만, 남부럽지 않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으셨는지 초등학교 시절 때 까진 방학 때마다 여행을 다녀왔다. 제주도, 사이판, 괌, 하와이, 프랑스, 스위스, 태국 등을 돌아다녔는데, 워낙 회사에서 잘 나가시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가장 좋은 호텔들만 골라서 다녔다.
그리고 아버지가 즐겨 입으시던 수영복이 있었다. 에메랄드색 80%, 검은색 20% 정도의 비율이었는데, 안감망사는 하얀색이었고 어린 내가 보기엔 엄청나게 큰 수영복이었다. 그만큼 편해서인지 집에서 입고 계시기도 했는데 그 수영복을 입고 자는 아버지의 배를 향해 다이빙하며 자지러지듯 웃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휴양지에 갈 때마다 아버지는 그 에메랄드색 수영복을 즐겨 입었다. 우리는 바다와 수영장을 오가며 서로 개헤엄을 하는 모습을 보며 웃으며 행복해했다. 하늘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하늘색이었다. 그런데 바다마저 같은 색이어서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수를 하면 바로 옆에서 알록달록한 물고기들이 보여 홀린 듯이 손을 뻗히기도 했고, 해파리를 보고 놀라 코에 바닷물을 들이켜 기침을 하며 도망치기도 했다. 호텔 수영장의 물은 투명하게 맑아서 바닥의 파란 타일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와중에 물의 표면마저 햇빛에 비쳐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잔잔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놀다 지치면 수영장 가장자리에 늘어선 야자수 밑 그림자에 있는 흰색 비치 의자들에 누워 쉬었다. 해가 뜨거워 선크림을 온몸에 덕지덕지 바르고 있었지만, 한국에 돌아오니 피부가 빨갛게 타서 벗겨졌다. 결국 초등학교 시절 내내 나의 별명은 흑돼지가 되어버렸다.
기억 속 완벽했던 순간. 아버지가 지금 그런 곳에서, 그때처럼 행복하게 웃고 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런 순간들이
아름다운 추억들이
나와
아버지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소중하게 기억되길.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