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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석 Apr 26. 2024

집에서 청개구리 43마리를 풀다

과천 주공아파트 8단지

다음날 정신을 차려보니 분당 서울대병원의 장례식장 의자에 앉아있었다. 사망에 대한 사유로 입관이 늦어져 팔 에는 아직 상주완장이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완장의 줄의 의미는 부모님을 오래도록 모시지 못한 ‘죄’의 표시라 했다. 아무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뭐가 중요할까.


어제 잠이 오지 않아 위스키를 2잔 먹어서 그런지 머리가 더 멍한 듯싶었다. 난 온몸에 힘을 빼고 앉아 영정사진을 멍하니 쳐다보며 내 인생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나는 시작 지점을 더듬어 봤다. 영정사진의 얼굴은 주민등록증에 있는 사진을 사용해서 인지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다. 얼굴에 생기가 돌고 무엇보다 눈에 힘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니 과천 주공아파트 8단지에 살던 시절이 기억났다. 803동 502호였던가. 부동산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준공이 1983년 8월이다. 내가 1983년 9월 생이니 당시에는 굉장히 신축에 해당되었던 단지였던 것 같다. 기사들을 보니 지금 당장이라도 재건축이 진행될 것만 같다.


‘재건축이 시작되기 전 한 번은 꼭 들러서 사진을 남겨야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마치 머릿속의 소중한 추억들이 저장될 것만 같다.


정말이지 철없고 해맑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아직도 연락하는 나의 친구 윤형이, 지금은 연락이 끊긴 지훈이와 같이 하루종일 팽이치기, 롤러브레이드 타기 , 연날리기, 개구리 잡기, 곤충 잡기, 딱지치기를 하며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어느 비 오는 날엔 친구들과 서울대공원 근처의 논밭에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가 시간 가는 줄 몰라 저녁 늦게 들어온 적이 있었다. 어른들은 우리가 인신매매라도 된 줄 알고 확성기를 들고 방송을 하며 단지를 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생생한 개구리를 많이 잡아 마냥 기분이 들떠 있었다 나랑 윤형이는 43마리의 개구리를 나눠가졌고 그 개구리들은 베란다에서 풀어지는 바람에 온 집안을 초토화시켰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같은 단지에 살고 계셨다. 부모님의 신혼집을 마련해 주셨다고 알고 있는데 당연히 가까운 곳에 마련해 주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꽤나 엘리트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경기고, 서울대를 조기졸업하고 석사는 KAIST를 하신 나름 어렸을 당시 동네에서 알아주는 수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를 존경했다. 훗날 이야기를 들어보니 몇 가지 이력 밖에 듣지 못했지만 대단하시긴 했던 분이었던 것 같다. 교과서에만 보았던 경성제국대학이라니..!! 그 큰 제약회사가 할아버지 약사 면허증으로 시작되었다니..!! 그 시절 벤츠가 집에 2대나 있었다니..!!


나는 친가 쪽 사촌형제를 통틀어 가장 공부를 못했지만 할아버지가 정말 사랑해 주셨다. 덕분에 어린 나이부터 할아버지에게 산수 과외를 받았었다. 나가서 놀기만 하고 싶었지만 교육과정에 산수가 중요하다고 느끼셨나 보다. 하지만 난 공부하는 시간들이 정말 싫었다. 청개구리 같은 내 성격은 모든 걸 반대로 실행했고 언제나 성적은 학급에서 하위권에 머물렀다. 그리고 수학은 학창 시절 가장 자신 없고 노력해도 성적이 나오지 않는 과목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수호도 내 아들이니 내 성격을 많이 닮았을 것이다. 아마 무언가를 억지로 시킨다면 반대로 행동할 확률이 크다. 성격은 아내를 닮길 바라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합리적인 이유로 납득시킨다면,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겉으로는 언짢은 표정을 짓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온몸과 마음으로 그 방향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는 것도 안다. 이래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나 보다.




아버지 어머니는 1956년생 동갑이시다. 27세에 결혼하시고 바로 나를 낳으셨다. 아마 내가 기억이 시작되었던 시점일 때 두 분은 30살 초반 정도이었을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취직과 출산의 시기가 늦어지긴 했지만, 내가 지금 40살이고 30살 초반을 볼 때 주니어라고 생각하는데 그때 부모님은 5살 정도의 나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주 6일 근무가 일반적이었는데 아버지 항상 늦게 귀가하시고 일찍 출근하셨다. 욕조에서 잠깐 잠든 후 바로 출근하셨을 때도 있었다. 쉬는 일요일에는 하루종일 일주일간의 모자란 잠을 보충하셨다. 그래서 그 시절 아버지의 모습은 대부분 회사와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가족을 돌보기 위해,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본인의 성취감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셨을 거다.


우리는 비교적 워라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내가 근무했던 컨설팅 회사도 예전보다는 개인적인 시간 혹은 가족과의 시간을 점점 더 소중히 여기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다음날 퇴근하고 주말에도 일하고 체력이 달리면 링거 맞으면서 잠깐 눈을 붙이던 때는 이제 “라떼(나때)는…” 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처음에는 워라밸을 이야기할 때 나이브(Naive)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과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낀다. 우린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할까. 선택을 해야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후회가 없으면 좋겠다.


수호가 태어난 지 34개월 되었으니 점차 이 시절을 기억하는 시기가 되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마다 어떤 아빠로 기억되는 게 좋을지도 생각하게 된다. 재밌고 긍정적인 아빠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집중하고 어떤 결과라도 보는 아빠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정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내 건강부터 잘 챙기는 아빠가 되고 싶다. 같이 피부를 맞대고 부대끼는 순간들을 따뜻하게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당연히 부족한 모습들을 보여주겠지만 수호가 나이를 먹게 된다면 그런 모습조차 좋아해 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내 아들은 나를 닮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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