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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19. 2024

밤 열두 시 십사 층 : 내게 있던 모든 것을

마트, 백화점, 소규모 가게와 같은 오프라인 매장 안에서 고객들이 관리가 되느냐 마느냐는 서울 안에서도 지역별로 매출 차이가 크게 나는 이유가 된다. 매장 매니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나이가 많고 경력이 오래된 매니저들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 매출을 일정 수준 달성할 시 급여인상을 시켜주겠다고 해도 압박을 하지 마라, 더이상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라며 대들기가 십상이다. 처음엔 인간적인 관심을 주며 매니저들과 잘 지내보려고 애를 썼으나 이제는 업무적인 것 외에 일체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오프라인 매출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매니저에게 틈만 나면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돌려 그들의 컨디션을 살핀다. ……다시 두통이 시작되었다. 가방 안에서 두통약을 꺼내 입에 넣는다. 반년 전부터 시작된 잦은 두통은 약을 먹어도 도통 잦아들지 않는다.  


잠시 환기를 시킬 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쪽으로 걸어간다. 


어…… 어? 돼냥이! 


열린 비상문 쪽에 돼냥이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다.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거의 일 분여 동안 서로를 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는 돼냥이…….


나는 비상구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돼냥이가 계단 아래로 날쌔게 사라져버린다. 돼냥이를 따라 계단을 내려간다. 구 층까지 내려갔을 때 돼냥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열려 있는 비상문 사이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섰다. 구 층 건물 안은 지하 주차장처럼 어두컴컴했다. 


긴 통로에 양쪽으로 들어찬 수십 개의 방에는 전부 슬라이드가 쳐져 있어 복도엔 햇살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각 방마다 면접이 진행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이 방 앞에서 일렬로 줄을 선 채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판매사원, 인사부 팀원, 회계원…… 뽑고 있는 신입 사원들이 방마다 다른 듯했다. 나는 돼냥이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어두운 복도를 계속 걸어갔다. 


복도 끝, 마지막 방 앞에 누군가가 혼자 서 있었다. 대기하고 있는 면접자 중에서 그의 차례가 마지막인가 보았다. 면접실 문이 열리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그는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언제부터 이곳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 갇혀 있는 포로처럼 한 곳에 붙박혀 있는 그. 그를 손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먼지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릴 듯했다. 돼냥이를 찾으려고 했던 것인데 나는 그만 면접남과 눈이 마주치고 만다. 주변이 어두운 탓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웅덩이처럼 푹 꺼져서는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끝난 거요?”


면접남은 내가 면접을 치르고 나온 줄 안 것 같았다. 


“아뇨. 아뇨.” 


그가 실망한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여기 직원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힘없이 얼굴을 떨군다. 면접남은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 정도 많아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양이를 찾고 있어요.” 

“…….”

“혹시 보셨어요?”

“싼티의 고양이?”

“누구 고양인지는 저도 몰라서…….”


어째서 싼티를 알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면접남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구지 묻지 않았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돌아서서 걸음을 떼려는 찰나 나지막이 면접남이 입을 열었다.  


“칠 년째야.”

“…….”

“칠 년째라고.”

“……네?”

“이곳에서 면접만 칠 년째 보고 있어…….”


칠 년은 내가 이곳에서 회사를 다닌 햇수와 같다. 나는 몸을 돌려 면접남을 바라보았다. 면접남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 번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어.”

“…….”

“누구나 원하는 것을 나도 한 번쯤은 가져보고 싶은 거니까.”

“…….”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그렇죠.” 

“이곳에 오기만 하면.”

“…….”

“이곳에 올 수만 있다면…….”

“뭐, 다 끝난다고…….”

“…….”

“생각하는 건가요?”

“정말 그런가?” 

“…….”

“다 끝날 수 있는 건가?”

“……글쎄요.” 

“당신…….”

“…….”

“행복한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원했던 곳이란 사실이 새삼스러웠긴 했지만, 그러나 지금 그와 나의 처지가 서로 다르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고양이를 찾다가 길을 잃은 꼴이라서요.”

“끝나지 않겠지…….”

“평생.”

“왜 계속 이짓을 하고 있는지…….”

“…….”

“날 끌고가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거야.” 

“저런.”

“…….”

“근데요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요.”

“…….”

“여기 오셔도…….”

“…….”

“당신 상사가 당신을…….”

“나를?”

“소처럼 끌고 갈 거예요.” 


면접남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게 뭘까. 면접남 왼쪽 어깨 위에 실 같은 것이 달려 하늘거리고 있었다. 말끔한 검은 양복에 유난히 그것이 눈에 띄어 실을 떼 줄 요량으로 나는 면접남에게 다가가 어깨 위로 손을 뻗었다. 


“잠깐만 그대로 계세요.”

“돈 터치 미!”


면접남은 내가 자신에게 손을 뻗자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에?”


나는 너무 단호한 면접남의 태도에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돈 터치 미! 제발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하라는 거요. 근 십여 년 동안 내게 손댄 사람은 돌아가신 외조모 밖에 없으니까.”


당혹스러워 하는 내 얼굴을 보고 면접남이 머쓱한 듯 고개를 떨군다. 


“나는 내 피부에 닿는 모든 것…… 을 무서워하는 포비아를 앓고 있다는 말이요.”

“아.”

“사람도 동물도 물건도 피부에 닿으면 그것은 내게 공포 그 자체야. 지하철에서 누군가와 어깨라도 부딪치는 날엔 하루종일 보이지 않는 세균이 내 몸을 기어 다닌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 거야.” 

“대체…… 어떻게 사세요?”

“내가 정상이 아니란 걸 아는 것부터 시작해. 다른 사람들을 보며 저들은 수없이 많은 타인과 몸을 부대끼며 살아도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 되새기면서…… 그러니 나도 죽지는 않을 거라고 다독이지. 근데 그것도 잠시야. 또다시 말도 안 되는 걱정으로 나 자신을 갉아먹어.”

“저런. 누군가 당신 옆에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겠군요.” 


나는 면접남에게로 뻗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면접남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내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어 친구도 연인도. 아닌가. 어쩌면 내가 그들을 떠나보낸 것인지도 모르지…….”


면접남이 오른손으로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는다. 폰을 꺼내 뭔가를 들여다본다. 


“오늘 아침 동생한테 메시지가 왔더군. 힘내라는 문자였어. 칠 년 동안 빠짐없이 내게 문자를 보내줬더군.” 

“동생이 있나보군요.” 

“남동생.” 

“마지막으로 내 곁에 남아 있던 애, 옆에서 돌봐줘야 하는 애를…… 나는 떠나 온 거야.”

“…….”

“동생이 애원하더군. 제발 돌아오라고. 미안하지만 난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어.”


면접남은 그래도 세상의 모든 등불이 꺼진 것은 아니었다. 동생이 이 세상에 있는 한, 그가 면접남에게 빛이 되어줄 것이라는 것을 본인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면접남처럼 나에게도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을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한 말이죠.”

“…….”

“그 사람이 내 길에 이정표가 되어줄 수는 있는 것 같더라고요.” 


면접남은 고개를 젓는다. 


“가끔 의심이 벌레처럼 기어나오지 그럴 땐 밤새도록 게임을 하거나 술을 먹고 잔뜩 취해버려.”

“…….”

“눈을 뜨는 순간마다 어제와 똑같은 아침일까봐 무섭지…… 근데 그러다가 곧 괜찮아진다는 거야.”

“게임과 술이 있으니까.”

“유일하게 내 곁에 남아 있는.”

“친구…….”

“이제 아픔도 마음만 먹으면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 

“…….”

“밥 먹을 돈도 없으면서 술이랑 담배는 꼭 사다 놓지.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다가 가끔 이래도 되나 싶지만 그런 것도 곧 익숙해져.”

“…….”

“두려움…… 그것 때문인지도…… 그것 때문에 이 짓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말야…… 그건 세상이 내게 준 게 아니라는 거야. 그건 세상이 내게 준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내고 있었던 거라고. 실체도 없는 것에 나는 속은 거야. 완벽하게…….”


우리를 넘어뜨리는 장애물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쫓아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쫓아낼 방법도 알지 못한다. 기껏 해봐야 술과 게임 같은 소극적인 방식으로 그것에 대항하고 있는 것뿐이다. 실체를 알 수 없도록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조금씩 자라난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그것에 완전히 사로잡힌다. 


“싼티를 만나려 해.”

“……그분은 왜.”

“어쩌면…….”

“…….”

“다른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반대편 복도 쪽에서 웅웅 거리는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대여섯 명의 면접자들이 면접을 끝낸 후 한쪽 방에서 우르르 흘러나왔다.  


“아, 참 고양이를 찾고 있었는데.”

“저기.”

“……네?”

“저기로 가봐.”


면접남이 손으로 복도 끝 오른쪽 통로 쪽을 가리켰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굿럭.”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고 그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는 숨을 깊게 내쉬고는 면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면접실 문이 닫혔고 그가 없는 복도는 더 어두워졌다.      

복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끝까지 걸어가자 화장실이 나왔다. 나는 천천히 화장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장실 안에서 바람이 불어왔는데 누군가 창문을 열어둔 듯했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져 한껏 몸을 움츠렸다. 


“흐으…… 흐으으으.”


안쪽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맨 뒤 칸 화장실 문이 열려 있었고 나는 그 앞에 멈춰 섰다. 바닥 군데군데 빨간 핏방울들이 떨어져 있었다. 긴 머리의 여자가 등을 보인 채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여자는 자해를 한 듯했다. 인기척 소리에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씨익 웃었다. 


여자는 인사과 부서의 막내 상미였다. 상미는 지난주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새신부였다. 전체 회식 때 간혹 만나면 서로 술을 따라 주며 이런저런 얘기를 터놨던 터라 우리는 꽤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상미의 결혼식 날. 신부 대기실에 있는 상미의 얼굴을 멀리서 잠깐 보고 축의금만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기실에 수줍게 앉아 있던 상미의 얼굴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밝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 그때 보았던 아름다운 신부가 화장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쥐어 잡고 파르르 떨고 있다.  


“놀…… 랐어요?”

“……조금.”

“이렇게 하고나면 좀 기분이 풀리는 것 같더라고요.” 

“…….”

“근데 여긴 웬일이세요?”

“뭘 좀 찾고 있어.”

“…….”

“신혼여행은 잘 갔다왔니?”

“……덕분에.”

“어디 좀 봐.” 

“아니 괜찮아요.” 

“…….”

“그래도 죽지는 못해요. 겁쟁이라.” 

“남편은?”

“잘 있어요.”

“…….”

“이건 결혼이랑 전혀 상관이 없어요.” 

“…….”

“결혼했다고 우울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누가 뭐랬니?”


순간이었다. 상미가 오른손으로 붙잡고 있는 왼쪽 손목에서 핏물이 팔꿈치까지 주루룩 흘러내렸다. 상미와 나, 우리 둘 다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왜요?”

“…….”

“왜 그렇게 봐요. 선배…….”

“그냥 본 거야.”

“……몰래 이런 거 하는 사람이 나 뿐인 줄 아세요?”

“근데 너처럼 걸리는 사람은 없더라고.” 

“……너무 오래됐어요.” 

“…….”

“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부터 했던 거예요. 엄마 몰래 했던 거라 끊을 수는 없어요. 대리님.” 

“나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아빠는 항상 어릴 때부터 이것만 하면, 여기만 되면…… 그러셨어요. 이번에 결혼할 때도 이 사람과 하기만 하면…… 원하는 건 다 가졌어요. 결혼도, 집도. 차도…… 정말 제가 원하는 건 다 가졌어요. 아니 아버지가…… 원하는 거였을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묻니.”

“……내가 내 인생을 내팽개친 거예요. 저는 비겁했어요. 내가 결정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상미의 눈이 벌게졌다. 입술이 떨렸다. 

“울지 마라.” 

“…….”

“나 지금 고양이 찾아야 돼.”

“……고양이?”


고양이 얘기가 나오자 기어이 상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늘매…….”

“…….”

“늘매야…….”

“…….”

“어딨어 늘매야…….”


꺼이 꺼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하는 상미. 


“그만 해라.” 

“늘매야…….”

“누가 오겠어.” 


억지로 울음을 삼켜가며 상미가 입을 뗀다. 


“정대리님.” 

“저기…… 나 늘매가 누군지 안 물어봤다…….”

“우리집 고양이 늘매…….”

“…….”

“늘매가…… 사라졌어요.” 

“……후우.”

“아니, 사실은요 제가…….”

“…….”

“혼자 살 때부터 키워왔던 고양이에요. 혼자 자취할 때부터…… 버려진 고양이었는데 저 같은 애 데려다 키운 거예요. 집도 없는 애니까…… 얼마나 추울까. 힘들까. 그런 애를 내다 버렸어요. 어제…… 길에다가 버렸어요. 자기를 버리고 가는데 가만히 울지도 않더라고요. 보고 싶어요…… 저를 버린 거나 마찬가지에요…… 내가 날 버린거라구요.” 

“…….”

“대리님…….”

“그럴 수 있어.”  

“아니요.” 

“……괜찮아.”

“저는 저를 절대 용서 못해요.” 

“너는 용서가 안 돼도.” 

“…….”

“늘매는 용서할거야.”

“…….”

“……오늘 한 번만 내 말 믿어.” 


말하는 중에도 계속 상미의 왼쪽 손목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 그거 누가 청소하니.”

“…….”

“피 빨리 닦아.” 

“그 사람을 알아요.” 

“……응?”

“고양이를 주워다 키우는.”

“…….”

“싼티가 보고싶어요.” 


싼티의 이름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피로 얼룩덜룩해진 화장실 바닥을 상미와 함께 물티슈로 닦아냈다. 몇몇 사람들이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들어왔지만, 그들은 상미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상미의 왼쪽 손목은 혈액이 응고되면서 더이상 피가 나지 않았다. 눈물을 닦고 상미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상미를 보내고 혼자 남은 화장실 안에서 손을 씻었다. 오늘 봤던 상미의 모습은 물에 씻겨 보내기라도 하듯 오래도록 손을 씻었다.      


화장실을 나와 비상구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 중으로 돼냥이를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팔 층은 점심시간에 특히 붐비는 곳으로 휴게실, 수면실, 간단하게 음식을 섭취할 수 있는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 비상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단 한 명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


화장실 앞 파우더룸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파우더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울 앞 테이블에 앉아 게걸스레 과자를 흡입하고 있는 여자. 주비서. 주비서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녀의 양쪽 귀에 초승달 모양의 귀걸이가 달려 있다. 


“이런.”

“아…….”

“보시다시피 배가 고파서 말이죠.”

“아…… 네…….”

“이 시간만 되면 늘 달달한 게 땡겨서.”

“저는 상관 마세요.”

“난 배가 고프면 눈이 돌아가는 사람이라.”

“뭐, 다 먹자고 하는 거 아닌가요.”

“근데…….”

“네?”

“과장이 안 찾아요?”


주머니 속에 든 폰이 울리지 않는 것을 보니 사무실에서 날 찾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은?”

“내가 이러고 있다는 거 과장한테 비밀.”

“아이고 그럼요.”

“당신이 이러고 싸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안 비밀.”

“뭔 소리.”

“뭐?”

“아니요, 아니요.”


원탁 테이블 위에 수십 봉지의 과자가 쌓여 있었다. 주비서는 근처 편의점을 털어온 것 같았다. 과자들은 종류별로 나눠져 있었는데 오른쪽은 봉지 과자들이, 중간은 초콜릿류, 왼쪽엔 징그럽게 생긴 젤리들이 널려 있었다. 


내가 있든 말든 상관없이 주비서는 과자 흡입을 멈추지 않는다. 주비서는 종류가 다른 과자들을 빠르게 번갈아가며 한 움큼씩 집어 입에 넣는다. 입에 엔진이라도 달린 듯 먹는 속도에 점점 가속도가 붙는다. 과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간다. 주비서의 오물거리는 입이 클로즈업되어 내 눈에 들어온다. 벌건 립스틱이 입술선 밖으로 번져 있고 초콜릿과 과자 부스러기들이 입 주변에 지저분하게 묻어 있다. 테이블에 널려 있던 과자들이 주비서의 블랙홀 같은 검은 입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나는 마치 묘기를 감상하듯 주비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나는 일만 명의 구독자 중 가면을 쓰지 않은 주비서의 먹방 라이브를 코앞에서 보게 된 유일한 구독자가 되었다. 주비서는 라이브 방송을 하지 않을 때에도 혼자 먹을 때는 늘 입을 쉴새 없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내사랑 초코초코초코초코. 초코바, 초코렛, 초코빵, 초코링, 초코콘, 초코쿠키, 초코샌드…… 얘네들은 숨만 쉬어도 존재 자체가 사랑스러울 따름이잖아. 요 통통한 아이는 요즘 신상이라 핫 하잖아. 양파깡 상위 버전 같잖아. 설탕 범벅에 불닭 소스를 섞어 놨는데 먹는 순간 냉탕이랑 온탕이랑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잖아. 먹을수록 중독성이 쩔어버린다는 거잖아. 요건 내가 아끼는 젤리잖아. 모양이 다채롭고 눈이 부시잖아. 입으로만 먹는 게 아니라 눈으로도 먹는 거잖아. 정말 참신하잖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잠자리 젤리는 눈부터 떼서 먹어야 하잖아. 바퀴벌레랑 사마귀는 입에 넣는 순간 얘네들이 입천장을 기어 다니는 것 같잖아. 침이 폭포수처럼 입안에 쏟아지잖아. 혀를 돌려가며 천천히 심장까지 녹여 먹잖아. 이건 비밀인데 있잖아. 처음엔 초콜릿으로 뇌를 녹여주는 거잖아. 그리곤 과자로 배를 채우잖아. 마지막은 젤리로 입가심을 하는 거잖아. 그걸 반복하면서 먹어줘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거잖아. 내 개똥철학이었다는 거잖아.”


한참 먹는 것에 정신을 놓아버린 듯한 주비서가 갑자기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맘에도 없는 말을 건넨다. 


“아, 맞다. 좀 드실래요?”

“아뇨. 아뇨.” 


나는 주비서가 사마귀 젤리의 다리 하나를 떼내 내게 건넬까 봐 조마조마했다. 


“복스럽게도 드시네요. 주비서님.”

“에이 설마.”

“진짠데.”

“이마에 쓰여 있는데 뭘. 네가 사람이냐?”

“아니라니깐. 먹는 즐거움이 없다면 어떻게 살겠어요. 안 그래요?”

“맞지. 다 먹자고 하는 거니까.”

“거 봐요.”

“근데 내가 정말 먹고 싶어서 먹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는 거지. 퇴근하고 가서 허겁지겁 저녁을 먹어. 야밤에 먹는 야식은 후식. 새벽녘 끊이는 라면은 내일을 위한 예의라고나 할까. 아침엔 어젯밤 먹은 남은 야식을 마저 해치우지. 점심 후 머릿속이 터질 정도로 군것질 생각으로 가득해. 견딜 수가 없어서 편의점에 뛰어가 마구잡이로 집어와. 퇴근할 때도 저녁에 먹을 메뉴들로 가득해.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뭘 먹을까, 로 시작해서 침대에 누울 땐 내일은 뭘 먹을까, 로 끝난다는 거야. 정말 먹기 위해서 나는 살고 있어.” 

“……누구든 사는 이유는 다르니까요.”

“밑도 보이지 않는 구멍에 끝도 없이 뭔가를 내리부어도 없어…… 아무 것도…….” 

“후우.”

“난 내게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병원에도 가봤어. 의사가 내게 그랬어. 정서적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고. 그 정서가 말야…… 대체 뭐라는 거라는 거지? 어쨌든 나는 그걸 애정 결핍이라고 이해했어. 난 당당하게 얘기했지. 미안하지만 난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그 의사가 내게 묻더라. 그 관계에서 지금 얻고 있는 게 뭐냐고. 난 당연히 뭔가를 말하려 했는데 그게…… 입이 안 떨어지는 거야. 당황해서 의사를 빤히 보고 있었는데 의사는 그런 나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어. 그날 이후 두 번 다신 병원에 가지 않아. 정서…… 의사는 마치 그것이 대단한 것처럼 얘기했어. 그 의사는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불완전해. 내 부모도 그것을 할 수 없었는데 누가 내게 줄 수 있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난 한 번도 무언가를 받아봤다고 느낀 적이 없어. 절친들을 만나고 오면 더 그랬어. 남자를 만나고 음식을 먹고 쇼핑을 해도 나는 도무지 받았다는 느낌이 들지를 않는 거야. 참 이상하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다는 게. 내가 먹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록에 남겨두는 거야. 영상이든 사진이든 말이야. 매번 그것을 확인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진짜 같지 않은 거야.” 

“기록용치고는 너무 재미가 있던…….”


주비서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나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먹을 때 내 모습이 너무 추해. 집에선 가면을 쓰고 있어.” 

“주비서님. 근데 말이죠.”

“어?”

“당신을 통해 채워지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절대.”

“…….”

“그럴 일은 없어.”

“내기할래요?”

“무서워. 가끔.”

“…….”

“내가 나를 보는 게…….”


우리 회사의 여신이라는 사람이 내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나는 두 달 넘게 여신먹방 채널의 열렬 구독자였다. 적어도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했다. 자신이 여신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은 여신 자신뿐이었다. 어차피 업무 시간에 농땡이를 부린 건 피차 변명할 여지가 없으므로 나는 좀 과감해지기로 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

“여신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줬어요?”

“여……신?”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는 주비서. 왼쪽 손가락에 묻은 과자 스프를 빨아먹으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주비서는 내가 여신먹방을 보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을 것이다. 언젠가 사촌 언니가 내게 해 줬던 공주 얘기가 떠올랐다. 나는 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죠. 교활한 새 왕비가 있었어요. 아름다운 공주를 추남 나라에 사는 왕자에게 시집 보내기 위해 새 왕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세요?”


왼쪽 손가락을 입에 넣은 채로 주비서가 고개를 갸웃한다. 


“추남 나라? 공주가 왜 추남이랑 결혼을 하지?”

“새 왕비가 좀 나쁜 인간이었나 보죠.” 

“아니지.”

“네?”

“돈이 많나보네. 추남이.”

“…….”

“아니면 치명적인 매력이 있던가.”

“아니 그게 아니라 빨리 맞춰봐요.”

“글쎄. 새 왕비 지가 낚아채간 건 아니고?”

“…….”


머리가 아파왔다. 어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새 왕비는 명령을 내렸어요. 아름답다, 라는 말을 성에서 절대 쓰지 못하도록. 공주는 평생 아름답다, 라는 말을 듣지 못했던 거예요. 결국 공주는 자신이 추하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어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주비서가 나를 바라본다. 큰 눈매에 작고 앙증맞은 코. 사슴을 연상시키는 주비서의 얼굴. 우리는…… 평생 스스로의 가치를 남들이 결정 짓도록 자신을 허용한다. 끊임없이 확인받기 위해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구걸해도 얻지 못한다. 결국 남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수정시킨다. 끝내 자신의 몸과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제가 갈 길이 멀어서요.”

“이봐요.”


나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결말은 알려줘야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입을 다문 채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주비서의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파우더룸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몇 걸음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나는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가서 또다시 한 층 밑으로 내려갔다. 구 층부터 일 층까지 모든 화장실을 돌아다녔지만 돼냥이를 찾을 수는 없었다. ……본의 아니게 회사 화장실 투어를 한 것은 꼭 돼냥이 때문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는 변기 위에 앉아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떼우는 사람, 입을 틀어막고 우는 사람, 병든 닭처럼 조는 사람, 스트레칭을 하며 다리를 찢는 사람, 빨대로 술을 빨아 먹는 사람…… 을 보았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는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화장실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 없고 알 수도 없고 평생 모를 뻔했던 사람들이었다. 보이는 세상과 별개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시간대에 화장실에 가면 그들을 볼 수 있다. 오늘 나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사무실 안으로 되돌아왔을 땐 퇴근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혼자 사무실에 남아 끝내지 못한 업무들을 붙잡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얼핏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떴을 땐 모니터 위에 그놈의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냐아아~~~~아옹. 


돼냥이는 입이 찢어질 듯 하품을 하며 한심한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아름다운 블루빛의 매끄러운 털이었다. 그러나 군데군데 얼룩덜룩한 진흙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아름다워 봐야 주인 없이 떠돌아다니는 고양이일 뿐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스멀스멀 또 다른 고양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꼬리가 잘려나간 갈색 고양이가 과장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외계인처럼 생긴 징그러운 고양이는 도리 선배의 책상 위에서 배를 까뒤집는다. 온몸의 털이 까만색인 또 한 마리는 복사기 위로 펄쩍 뛰어오른다. 대체 몇 마리가 몰려오는 걸까. 눈 깜짝할 사이 삼십 마리는 족히 넘어 보이는 고양이들이 사무실 사방에 널려 있었다. 다들 꾀죄죄한 모양새에 길거리를 헤매는 더럽고 냄새나는 고양이들이었다. 


기이하고 경악스런 모습을 나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출입문 위에 붙어 있는 디지털 시계는 밤 열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고양이들만 몰려오는 게 아니었다. 뭔가 사람의 형체들도 천천히 이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귀신인가. 나도 모르게 소변을 찔끔 바지에 지려버린다. 


……다행히 그들 사이에서 낯익은 사람이 있었다. 하오 아저씨였다. 하오 아저씨 옆에 옥망 여사도 보였다. 그리고 오후에 마주쳤던 면접남과 상미, 주비서, 삼각김밥녀와 울보남, 닭조녀, 다리찢기녀, 빨대남……도 보였다. 기획부와 영업 일팀 사이 널찍한 통로에서 그들은 바깥 빌딩 숲이 훤히 내다보이는 유리벽을 향해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거나 비스듬히 서 있거나 바닥에 드러누워 있거나 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그들을 바라봤다. 무엇을 위해 모여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짐작하건대 침묵하는 것이 이곳 모임의 룰인 것 같았다. 


면접남이 나를 보자 아는 체를 하며 내게로 걸어왔다.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건네주는 면접남. 혹여라도 내 손을 스치기라도 할까 봐 손끝으로 종이컵을 들고 있다. 따뜻한 종이컵을 손에 받아들고 나는 잠시 주춤거렸다. 


“고마워요. 근데 이거…….”

“싫어하나?”

“아니요.” 

“……그럼?”

“술…… 은 아니죠?”

“설마.”

“저희 자주 보네요.” 

“고양이는?”

“저기 제 책상 위에.”

“당신이 맘에 들었나보네.”

“어쩌나…… 저는 마음을 줄 생각이 없는데.” 


면접남은 희미하게 웃으며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면접남이 건네준 차는 레몬버베나였다. 나는 차를 한 모금 입안에 넣었다. 긴장했던 몸이 일순간 사르르 풀어졌다. 천천히 나도 그들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곳에 모여 있는 그들이 준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전등 하나 밖에는. 얼마 후 누군가 사무실 전등을 모두 소등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시간이지만 그것이 나를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로 옆에 있는 것처럼 주변이 따뜻해졌고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순간 해일처럼 달빛이 유리벽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등불 하나 켜지 않았는데도 모두의 얼굴이 식별될 만큼 주변이 밝아졌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모두 들고 있던 손전등을 켰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밖으로 빛을 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그들은 허공에다 대고 그저 빛을 쏘고 있는 것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 간판에 공유 얼굴을 내건 건물에서 우리와 같은 신호를 보내왔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들도 그리 많지 않은 수의 무리인 듯했다. 손전등 하나로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저 서로가 존재하고 있다는 확인 같은 것이 필요한 것 같았다. 잠깐 동안의 빛들의 신호가 끝나고 나서 그들은 손전등을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 풍경이 무슨 아름다운 바다라도 되는 듯 그들은 입을 다문 채, 보이는 것은 은회색 달빛이 전부인 허공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들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것도 같았다. 하오 아저씨가 나에게 다가왔다. 


“처음엔 보이지 않을 거야. 그러다 천천히 보이기 시작하지.” 

“뭐가요?”

“달빛이 들려주는 이야기.” 

“……아.”

“똑같은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법이거든.” 

“네.”

“영화였어.” 

“영화…….”

“젊을 땐 잘 모르지만 서서히 느끼게 되지…… 내게 있던 모든 것을 하나씩 잃어가는 이야기일 뿐이야.”

“…….”

“육십 년 만에 알게 된 거야. 이 모든 게 꿈이었어. 육십 년 만에 깨어난거야…….”


달빛이 비춰주는 환영 속에서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눈을 가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보고 있어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한때 유행했던 트로트 같은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상미와 옥망 여사가 서로 다정하게 붙어 앉아 있다. 노래를 부른 사람은 옥망 여사였다. 상미의 왼쪽 손목에 옥망 여사가 약을 발라준다. 많이 해본 듯 둘은 이제 이런 것에 익숙한 것 같았다.  


“그러지 말어.”


상미가 어린애처럼 훌쩍거렸다. 


“너 같은 딸이 하나 있다고 내가 말했었나?”

“…….”

“오늘 따라 많이 생각나데…….”

“…….”

“무섭게 몰아붙였지. 성공하라 그랬어. 내가 못이룬 것을 내 딸에게 밀어붙인 거지.” 

“…….” 

“그러다 끊어졌어.” 

“뭐가요?”

“딸내미 마음.” 

“…….”

“연처럼 하늘 위로 날아가버렸어. 찾을 수가 없어.” 

“…….”

“노래를 하고 싶은 이유지. 우리 딸애가 나 노래할 때를 제일 좋아했어.” 


나를 본 상미가 내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보낸다.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일어나 옥망 여사와 상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옥망 여사가 날 보며 반갑게 말을 건넨다. 


“어서와요.”

“…….”

“처음인가?”

“네…… 근데 저…….”

“응?”

“다들 여기서 뭐 때문에…….”

“보시다시피.” 

“…….”

“우리는 감상 중이다 아니가.” 

“……달구경?”

“고렇지.”

“그…… 싼티는요?”

“근처에 있을 건데.”

“그 여자가 사람을 부른 건가요?” 

“즈그들이 알아서 모인 거지 가는 사람을 부른 적이 없다. 고양이랑 식물한테 미쳐있는 아가 무슨 그런데 관심이 있겠노. 언제부터 왜 이라고 있는 지는 우리도 모른다 이말이다.” 

“…….”

“왜?”

“아뇨…… 달빛이 너무 좋네요.” 


싼티는 그들 속에 없었다. 싼티가 돌보는 고양이와 식물들이 가득한 이곳에 그들도 그런 고양이와 식물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버려진 인간들…… 고양이와 식물들을 보며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위로를 얻는 건지도……. 나는 싼티 찾기를 포기하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보이지도 않는 달빛 영화를 보다가 졸다가를 반복했다. 새벽 두 시가 넘어가도 그들은 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뭔가를 바라봤다. 밤이 새도록 그들은 그렇게 있을 것 같았다. 새벽 두 시 십분.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떡처럼 늘어진 몸을 질질 끌고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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