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진전이 되지 않는 보고서를 붙잡고 모니터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고서에 들어갈 그래프 하나를 겨우 완성하고 얼핏 시계를 보니 아홉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배가 고파왔다. 탕비실에서 마들렌을 챙겨와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늦은 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사무실에는 나밖에 없었다. 불현듯 빗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던 빗소리는 금세 귀가 울릴 정도로 거세어졌다. 빗소리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마침내 책상 밑에서 고양이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옥망 여사와 하오 아저씨, 면접남과 상미, 주비서, 삼각김밥녀, 울보남, 닭조녀, 다리찢기녀, 빨대남…… 지친 하루를 마감하고 이제 곧 상영될 달빛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천천히 그들이 사무실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책상에서 일어나 그들 곁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목을 길게 빼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늘은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저어기.”
순간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싼티, 그녀였다. 그녀는 옷소매를 걷어붙인 채 한눈에 봐도 무거워 보이는, 야자수처럼 몸통이 굵고 사람 키 만한 식물이 심겨진 화분을 품에 안고 있었다.
“저기.”
“…….”
“저기.”
“나……요?”
“저거 저거 저거.”
그녀가 턱을 치켜들며 가리킨 곳은 복사기와 휴지통 사이에 놓여 있는 화분이었다. 언제나 무심히 지나쳤던 화분. 화분 안에는 각지고 못생긴 잎들과 떨어지기 직전인 시들시들한 연보랏빛 꽃들이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저거…… 뭐요?”
“들어달라고.”
“네?”
“아니 애들 위에서 목 좀 축이게.”
“위?”
“저거 뭐냐. 옥상.”
“지금 비 오잖아요.”
“그니깐.”
앞뒤 설명 없이 그저 본인이 원하는 말만 하는 그녀. 비가 내리고 있는 그곳에 화분을 들고 가야하니 좀 도와 달라는 말인 듯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리로 돌아가 우산을 들었다. 복사기와 휴지통 사이에 놓여 있는 화분을 들고 싼티를 따라 옥상으로 갔다. 옥상은 주변 빌딩에 걸려 있는 전광판의 빛 때문에 충분히 밝았다. 싼티 그녀가 만든 듯한 허접스런 간이 천막 아래 식물들과 수십 마리의 고양이들이 싼티와 나를 보며 갸르릉거렸다. 싼티와 나는 세 번을 그렇게 화분을 옥상으로 옮겨다 날랐다. 회의실 한 켠에, 창틀 아래에, 탕비실 구석에 있던 화분들. 이상하게도 버려진 공간에는 무조건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고 싼티는 천막 아래 있던 화분들을 천막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입고 있던 검정색 팬츠가 모두 젖었으면서도 끝까지 우산을 붙잡고는 옥상을 들판처럼 팔짝거리며 누비고 다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홀딱 젖은 그녀는 신이 난 것 같았다. 무뚝뚝해 보였던 싼티. 그녀가 식물들 앞에서는 참았다는 듯 이야기가 터지고 만다.
“이 아이는…… 요 앞에 불타는 곱창집이라고 그 가게 폐업할 때 데려왔던 아이였어. 식당 들어가는데 옆통수가 너무 뜨거운 거야.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그토록 강렬하게 왔던 적이 없었어. 고개를 돌렸지. 이 아이가 날 보고 있었어. 식당으로 내가 들어서기 전부터, 아니지 아니야 아주 오래 전부터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어. 부러질 듯한 줄기들이 서로 풀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엉겨 있었어. 마지막 잎을 남겨두고 파르르 떨고 있었는데 이 아이는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던 거야. 곱창을 씹으면서도 그 아이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겠더라고. 점심을 먹고 회사에 가 청소를 하는데 계속 생각이 나더라. 바로 그날 저녁 다시 식당으로 가서 이 아이를 데려왔어. 매일 물과 햇빛을 듬뿍 먹였지. 한 달 만에 새순들이 나기 시작했는데 일 년에 분갈이를 두세 번은 했지 아마. 이제는 내 키만큼 자라났잖아. 동그란 잎들이 풍성한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 같아 일하다 말고 한참을 쳐다봐. 파리하게 죽어가던 소녀가 이제는 이토록 우아한 여인이 되어 있어. ……길고 날씬한 이 아이는 십사 층 사장실에서 구해왔던 아이야. 한 달간 사장실이 폐쇄 구역처럼 들어가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폐쇄가 해제되고 들어갔을 때 쓰레기통에 몸이 두 동강이 나 있었어. 시체 같았던 아이를 가지고 다시 흙에 심었어. 잎꽂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 당연히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며칠 만에 새순을 두 개나 틔워내더라. 살아 있었던 거야. 난 얘 볼 때마다 감사하다고 말해. 못나도 말이야…… 살아 있어만 주면 돼. 살아 있어야 뭐든지 이쁜 거거든. 동그랗고 작은 꽃을 입동에 피워 올리는데 그것만 보면 살아 있다고, 나 여기 살아 있다고 내게 대답하는 것 같아. 그것이 나는 고마워…… 아, 그리고 이 보랏빛 아이는 길바닥에서 데려왔어. 첫눈에 반했지. 시멘트 바닥을 뚫고 올라온 작고 네모난 공주에게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겠어. 미니화분에 옮겨와 심었지. 하루가 다르게 줄기도 잎도 쑥쑥 자라나더라. 토분으로 분갈이를 했는데 이젠 내 무릎까지 자라 올랐어. 보랏빛 꽃을 여름 내내 피워올려. 그러다 가을이 오면 꽃이 떨어지지. 시간이 흘러 흐릿해진 연보랏빛 꽃잎 안에 씨앗들을 가득 남겨놓고 잎을 내려놓지. 난 그게 너무나 소중한 거야. 이 아이가 지는 것이 내게는 더 소중해. 그 모습이 나는 더 좋더라고. 질 때. 그때가 더 아름다워. 이 아이는…….”
원했던 건 아니지만 방금 나는 복사기와 휴지통 사이에 놓여 있던 연보랏빛 식물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싼티와 푸른 식물들만이 알고 있는 러브스토리.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은 식물은 하나도 없었다.
……!
불현듯 바람이 불어왔다. 몸도 휘청거릴 만큼 강한 바람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우산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우산은 바람을 따라 하늘 저 위로 사라졌다. 나는 등을 동그랗게 말고 멈춰 있었다. 잠시 뒤, 고개를 들었을 때 싼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 대신 누군가 서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것일까. 푸르른 빛을 띄고 있는 아이. 이파리에 휘감긴 채 내게서 뒤돌아 서 있는 아이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옷 때문에 아이의 가지처럼 마르고 앙상한 몸이 드러났다. 빛에 이끌리듯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에 손을 갖다 대려는 찰나 아이가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아이 대신 싼티가 나를 보더니 흐어, 하고 웃고 있다. 천천히 나는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비만 오면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밖으로 데려가 달라고 아우성이거든.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지. 옥상에 데려와 흠뻑 목을 축이고 나면 한 달은 녀석들 얼굴에서 빛이 난다구. 눈이 부셔. 일하다 말고 넋을 놓고 아이들 얼굴을 바라보는데 이파리가 무슨 불꽃 같잖아. 하얗고 투명한 불꽃 말이야. 그 아이들이랑 그렇게 눈을 맞추고 있는 순간. 그 순간을 말이야. 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어. 절대로…… 나는 바꿀 수가 없는 거야.”
사랑은 발견되는 것인지 모른다. 이름도 없이 살던 그들은 발견되었다. 싼티 그녀로부터. 푸르른 잎사귀들은 자신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당당하게 비를 맞고 선 그들은 더이상 무엇을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 존재했고 그것으로 완성된 것이다.
철커덕.
옥상문이 열렸다. 옥망 여사, 하오 아저씨, 면접남, 상미, 삼각김밥녀, 울보남, 닭조녀, 다리찢기녀, 빨대남…… 열댓 명 남짓한 그들이 우산도 없이 옥상으로 들어섰는데 각자 손에는 화분이 들려 있었다. 우리는 화분을 옥상으로 날랐다. 회사 삼십오, 전 층 건물에 놓여 있던 화분들 모두. 한 시간 만에 옥상에는 백여 개가 넘는 화분들이 놓여졌다. 발 디딜 팀도 없이 옥상은 푸른 식물들로 가득해졌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구름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
한순간이었다. 식물들이 기지개를 피듯 숨겨 놓았던 가지를 하늘로 치켜들기 시작했다. 온 사방으로 가지들이 뻗어 나갔다. 비를 머금은 잎들은 부풀어 올랐다. 금세 어두운 하늘은 푸른 잎사귀들로 뒤덮여버렸다. 회색 건물들 사이에 나타난 거대한 숲. 비는 더이상 숲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푸른 나무들이 우거져있는 그곳에서 우리는 말없이 빗소리를 들었다. 슬금슬금 고양이들이 숲속으로 들어왔다. 푸드덕 푸드덕. 새들의 날갯짓 소리. 사방이 빌딩으로 둘러싸인 이곳 어느 틈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인지 수십 마리의 새들이 날아들었다. 때가 탄 검은 비둘기들과 자기 몸보다 세 배는 큰 날개를 가진 흑두루미, 그리고 노오란 방울새……. 휘이익 휘이익 휘이이익. 방울새가 울기 시작했다. 휘파람 같은 방울새 소리가 숲속에 번져나갔다. 비에 젖은 숲에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깊은 향기가 올라왔다. 그것은 광활하고 드넓은 대지의 숨결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숨결을 폐 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정말 숨은 달콤한 것이구나……. 새삼스레 나는 깨닫게 되었다. 기계처럼 하고 있던 호흡이 원래는 달달한 것이었다는 것을.
냐아아옹.
근처에서 고양이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면접남이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몇십 년 만의 안식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을 것 같던 면접남. 그러나 눈 한쪽을 잃어버린 고양이 한 마리가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다.
“대리님.”
“어?”
언제 이쪽으로 온 것인지 상미가 옆에 서 있었다. 상미의 길고 검은 머리가 비에 젖어 얼굴에 어지럽게 달라붙어 있었다.
“가만히 좀 있어봐요.”
상미가 내 발밑에 쪼그려앉는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 왼쪽 종아리에 엉겨있는 푸른 이파리들.
“잎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줄기들이 무거우면 이렇게 내려앉아요. 손 놓고 있으면 금세 가지들도 자기 마음대로 뻗어 나가죠. 보기 안 좋으니까 이렇게 묶어줘야 하는 거예요. 아, 그리고 다치면 안 되잖아요.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정말 꺾이거나 부러질 수 있으니까…….”
상미는 내 종아리에 엉겨 있던 줄기들을 조심스럽게 풀어올린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잔가지들을 가지런히 모아 노끈으로 묶는다. 건성으로 말고 두세 번을 야무지게도 묶는다. 그녀의 노끈 때문에 나무는 한결 정돈되어 보인다.
“설마 여기 있는 걸 다 하려고?”
“왜 못해요?”
“아니, 정말 잘한다 너…….”
상미는 언제 이런 것들을 배웠던 걸까. 화장실에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연약한 식물들을 상미는 마치 그녀 자신처럼 바라보는 듯했다. 상미는 지금 그녀 자신을 돌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샤아샤아샤아아아.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나는 좀 추워졌다. 아닌가. 이렇게 숲속에 있는 것이 나에게는 말이 되지 않는다…… 고 나는 생각한 것 같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 오전까지 과장에게 하반기 마케팅 전략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천천히 나는 물러났다. 뒤로 돌아서서는 출입문 쪽으로 걸어 갔다. 십사 층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주비서가 핸드백을 들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주비서는 비에 젖은 내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지겨워…… 보나마나 이파리나 들고 고양이들처럼 뛰어다니겠지.”
“…….”
“오해는 하지 말아죠. 난 저들과는 다르다는 것이 감사한 사람이라…….”
주비서가 내 옆을 휑하니 지나쳐 출입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택시를 불렀다. 집에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해도 몸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자리에서 엉덩이 한 번 떼지 않고 쉼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점심시간 삼십 분을 남겨두고 겨우 보고서를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숨을 고른 후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결재판을 전달하자 과장은 보고서를 훑어보더니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좀 더 추가되어야 할 사항들을 늘어놓았다. 결재를 받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자리로 되돌아왔다.
나는 두통을 가라앉힐 겸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화장실 안에 싼티, 그녀가 있었다. 마치 언덕 위에 심겨진 크고 아름다운 나무처럼. 화장실 창틈으로 새어드는 빛 아래에서 그녀는 드넓은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녀의 발 아래에서 작은 꽃과 고양이들이 평안과 위로를 누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박하사탕 향의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잎들이 사사삭거렸는데 그것은 마치 불꽃…… 하얗고 투명한 불꽃 같았다.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뒤로 돌아섰다. 나는 복도를 서성거리며 두통을 달랬다. 달빛 모임에는 더이상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전에 싼티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윤익 선배와 정말 사귄 게 맞는지 나는 그녀에게 꼭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퇴근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불금에 야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가방을 챙겨 들고 텅 빈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 버튼을 눌렀다. 화장실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하오 아저씨와 옥망 여사, 싼티였다. 하오 아저씨는 복도창의 잠금장치를 확인하며 안전 점검 중이었고 옥망 여사와 싼티는 이제 막 저녁 마감 청소를 끝내고 퇴근 준비를 할 모양인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십사 층에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아니면 기회는 없을 듯했다. 나는 그녀에게 곧장 걸어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나?”
“물어볼 게 좀 있는데…….”
“…….”
“윤익 선배 알아요?”
“누구?”
“윤익.”
“…….”
“기획부 과장. 윤익.”
“…….”
“진짜 몰라요?”
“…….”
“그분이랑 어떤 사이였어요?”
“윤……익.”
“정말 그분이랑 사귀었던 거예요? ”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건지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전 남친의 존재는 그녀에겐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니…… 잠시만.”
“…….”
“너무 많아서.”
이런 식으로 화려한 과거 경력을 자랑질하는 그녀. 내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싼티가 나를 다독인다.
“있어봐, 있어봐봐.”
싼티가 머리를 쥐어 잡고 몸을 비틀어댄다. 좀 건들거리지 말고 똑바로 서 있을 수는 없는 건지. 무슨 건달도 아니고…… 그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심하게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 같다.
“술 먹었어요?”
“무슨?”
“좀 가만히 똑바로 서 있어봐요.”
옥망 여사가 끼어든다.
“원래 저래 제.”
하오 아저씨도 거든다.
“우리 싼티가 얘기할 때 정신이 좀 나가보이긴 한데 근데 멀쩡한 애야.”
“암 그렇지. 근데…….”
옥망 여사가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다.
“대리 맞지, 정대리.”
“맞, 맞는데요.”
“가만 있어봐라…… 있잖아. 내가 이해가 안되는 게 하나 있는데 말이다…… 당신은 그 과장놈 좋아해서 한다는 짓이 과자 박스째 던지고 가는 기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몇 년째 그짓거리 하고 있는 거를 여기서 모르는 사람이 있는 줄 아나?”
“그걸 어떻게…… 허허 허허허허.”
“그렇게 과자 쪼가리 하나 사주고 있다는 거 밝혀지면 뭐 사랑이 이뤄지는 줄 아나보지. 남자들은 단순해서 평생 모른다…… 지 입에 처넣기 바쁘지…… 지금은 순정영화 찍을 때가 아니라 자신을 업필해야 하는 기다.”
드디어 싼티가 입을 열었다.
“아. 생각났다! 그 인간 그지 같앴잖아. 말도 못 알아먹고…… 답답했어…… 뭐 땜에 헤어졌었더라?”
“됐어요.”
옥망 여사가 싼티를 부른다.
“싼티. 좀 알려줘봐라. 저 대리가 몇 년째 마음앓이 중이라.”
“아, 그래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는 그녀. 이전 남친에 대해 이제는 정말 감정의 찌끄러기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가 좀 도와줄까?”
옥망 여사가 어떻게 날 도와줄 수 있다는 건지…… 확 땡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밀어낼 이유도 없을 것 같아 나는 약간 주춤거렸다.
“왜 대답이 없어?”
“그게…….”
고마운 하오 아저씨가 나 대신 대답을 했다.
“좋다잖아. 눈으로 대답했는데 뭘 따져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