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데이 하루 전.
수요일 늦은 오후에 들린 화장실에서 작전의 총 책임자인 옥망 여사가 내게 지시를 내렸다. 목요일 퇴근 시간 후 베지 샌드위치와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윤익 선배에게 건네라는 것이었다. 옥망 여사에게 하필 왜 베지 샌드위치냐고 물었지만, 옥망 여사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싼티도 내게 명령을 내렸는데 출근할 때 집에 있는 것 중에 가장 낡은 신발을 신고 오라고 했다. 싼티는 내게, 윤익 선배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아직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이십 년도 넘게 신은 어머니의 낡은 구두라고 말해줬다. 어머니의 이미지를 내게 덮어씌우겠다는 의도인 듯했다. 뭐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나는 신발장 안에 버리려고 처박아둔 앞창이 너덜거리는 검은색 구두를 꺼내 현관문 앞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드디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후 나는, 옥망 여사가 말한 그 메뉴를 손에 들고 선배의 자리에 찾아가 그것을 건넸다. 선배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눈을 비벼대며 내가 건넨 음식들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잠시 뒤. 선배가 그것을 건네받고는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선배는 정말 의외라는 듯이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생각만 하고 있던 메뉴를 어째서 네가 알고 내 손에 지금 건네주는 것이냐고 물어보는 듯한 당황스런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수줍은 웃음을 선배에게 날려주었다. 선배는 자기 책상에 앉아 조용히 그것을 다 먹었다.
사무실 안에 선배와 나만 남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자리에서 말없이 일을 했다. 열 시 오십 분 선배가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니터 화면을 끄고 가방을 챙겼다. 선배가 출입문을 향해 나가는 것을 보고 나도 일어나 선배의 뒤를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내내 심장이 떨려왔다. 내 인생의 마지막 몸부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단 한 번의 기회. 마음속에서 처음 들어보는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무의식의 흐름으로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드디어 때가 되었어. 집 없이 떠돌아다녔던 내 인생에 너라는 집을 내게 지어줘. 그곳에 들어가 살 수 있게 나를 보내줘. 내 초라한 인생에 너라는 집을 내게 지워줘.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곳. 너라는 사람. 너라는 집으로 나를 데려가 줘. 힘들었던 모든 시간들이 위로받겠지. 내 모든 아픔들이 눈 녹듯 사라지겠지. 단지 너 안에 산다는 이유로 말이야. 네 안에 내가 산다는 것으로 내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을 거야. 너의 표정 하나 몸짓 하나에 울고 웃었던 내 시간들을 돌려줘. 오랜 세월 동안 너 없이 시체처럼 죽어 있었던 나를 이제는 받아줘. 사랑보다 힘들었던 기다림. 너는 지금도 여전히 지진처럼 내 모든 것들을 흔들어놓고 부서뜨리고 망가뜨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걸. 절망과 환희, 기쁨과 고통, 빛과 어둠인 너. 축복과 저주, 두려움과 소망. 모두를 내게 던져버리고 떠나는 너. 너로 시작했다가 너로 끝나는 하루. 희망으로 눈 떴다가 눈물로 끝나는 이틀. 널 생각할 때마다 지나가는 모든 것은 바람조차도 널 불러일으키는 마법. 내게 모든 시간은 순간이었다가 영원으로 흘러가. 매일 아침 네가 내게로 오는데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데 꿈속에서도 너를 만났던 난데 매일 아침 나는 너로 시작하는데 그러는 건데 너는 나 없이도 시작이 되는 거니. 그게 가능은 하니. 내 기억은 불확실해. 내 기억은 망가졌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엉켜 있어. 너 때문에 그래. 나는 과거에 살아. 네가 있었던 그때 그대로. 현재에서는 울지. 미래에서는 네가 없는 영원한 시간 속에서 떨고 있어. 내 시간은 망가졌어. 내 기억은 믿지 못해. 너 때문에 그래. 너 때문에 그래. 네가 내게 했던 말들은 화석처럼 새겨져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 그것은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더 선명하게 태양처럼 빛날 뿐이야. 그것은 너로부터 흘러나와 나에게 왔다가 다시 너에게 되돌아가. 끝없는 바다처럼 나를 떠안고 끊임없이 너에게로 흘러갈 뿐이야. 그럴 때마다 나는 새롭게 돼. 나는 다시 시작하게 되는데 그게 모두 네가 내게 했던 말들 때문이야.
엘리베이터 앞에서 선배와 나는 어색하게 서로 웃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린다. 선배와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다.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덜커덩, 엘리베이터가 오 층에서 갑자기 멈춰 선다. ……아마 하오 아저씨가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에 질린 척하며 선배의 팔을 붙잡는다. 선배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비상벨을 누르지만, 반응이 올 리가 없다. ……드디어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감금되었다.
선배가 내 등을 토닥거리며 괜찮다고 해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선배는, 나와 너무 가까이 붙어 서 있다고 느꼈는지 한 발짝 옆으로 걸음을 옮긴다. 나는 계속해서 놀란 표정을 유지한다. 선배가 폰을 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아마 하오 아저씨에게 연락을 한 것일 것이다. 하오 아저씨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고 몇 분 후 통화를 끝낸 선배가 한숨을 내쉰다. 선배가 내게 엘리베이터가 다시 정상으로 작동하려면 한 시간은 걸릴 것 같다고 말한다.
선배와 나는 좁은 공간 안에서 엘리베이터가 다시 작동하기를 말없이 기다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선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신발이 꽤 오래된 것 같네…….”
“칠 년 전에 산 거예요. 아까워서 버리지를 못하고 계속 신고 다니네요.”
나는 말하면서 좀 뜨끔했다. 선배의 시선이 오래도록 내 구두에 머물러 있었다.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을까, 선배…….
다 떨어진 신발을 보고 엄마를 생각하는 너. 어떤 여자를 봐도 엄마를 떠올리는 너. 한 번 받았던 사랑을 평생 잊지 못하는 너. 그런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어디 그것뿐이니. 한 번 사랑하는 과자를 평생 사랑하는 너잖아. 내게로 와줘. 이제는 내게로 와줘. 생각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잖아.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온통 너의 생각 뿐이잖아. 너의 눈빛, 손짓, 몸짓까지 셀 수도 없이 너를 명상하잖아. 이토록 몰입했다면 수십 번도 고시에 합격했겠지. 너를 생각하느라 나를 잊어버려. 너가 너덜거릴정도로 생각하지만 너는 하나도 낡아지지 않아. 너는 티 하나 흠 하나 없는걸. 오히려 밤이 지나면 눈부시게 다시 태어나잖아. 너는 이토록 선명하게 다시 탄생하잖아. 영원히 죽지 않는 새벽처럼. 햇살처럼. 너는 영원히 살아 있어. 너의 전부를 알고 싶어. 너를 높이 들어서 탈탈 털어버리고 싶어.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때까지 전부를 알고 싶은 거야. 눈 뜨는 새벽부터 눈 감는 저녁까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걱정이 있는지, 어떤 메뉴를 먹고 싶은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속옷 색깔부터. 무슨 색이니. 그건 너무 한 거니. 그럼 양말 색깔은. 겉옷은 어떤 게 편하니,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셔츠는, 치약은 어떤 제품이니, 스킨은 어디 꺼 쓰니, 무슨 반찬이 냉장고에 있고 어떤 음식점을 좋아하니, 그리고 그 가게가 왜 좋은 거니, 달걀찜은 짭조름한 게 좋니, 아니면 밋밋한 게 좋니. 아니면 그런 건 먹지도 않는 거니. 액자는 너희 집 어느 벽면에 걸려 있는 거니, 설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야한 사진들만 줄줄이 걸려 있는 거니, 수저와 젓가락은 몇 개니, 양념통 중에 소금이랑 설탕은 얼마나 채워져 있니, 요리는 하는 거니, 한다면 뭘 요리하니, 책상은 어떠니, 컴퓨터 화면 높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하다고 느끼니, 눈이 피로할 땐 뭘 하니, 책은 어떤 걸 읽니, 음악은 뭘 듣니, 모든 것을 알고 싶어.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그것을 내 머릿속에 넣고 하루종일 돌려 듣고 싶어, 무한 반복으로 말이야. 듣고 또 듣고 싶어. 들려줘. 너를, 너의 모든 것을 내게 들려줘.
“놀랐니?”
“조금요.”
“늦게 퇴근하지 마라…….”
“왜요?”
“여자가 위험하게.”
“…….”
“저녁은 먹었니?”
“아뇨.”
“샌드위치 안 먹었어?”
“안 먹었는대요.”
“그럼 나한테 왜 줬어?”
“그러게요.”
선배가 웃는다.
“그러고보니 정말 오래 됐네…….”
“뭐가요?”
“……우리.”
“……오래됐죠.”
“내가 뭘 먹고 싶어하는지 말 안해도 알 만큼 말이야…….”
이제야 알다니…… 이제야 느낀거라니…… 눈에 뭔가가 낀 것 같았다. 나는 급히 얼굴을 숙였다. 눈앞이 뿌옇게 흐져진다. 선배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토닥토닥한다.
혼자 살고 있는 너. 너희 집 구조를 설명해줘, 내가 듣고 상상할 수 있도록, 특히 화장실이 궁금해. 그곳에 있는 너의 비밀스런 물건들을 내게 보여줘.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니, 칫솔이나 비누 하나까지 다 설명해줘. 칫솔질은 오른쪽부터 하는 거니, 비누는 펌프형이니 고체형이니, 샤워타월은 어디에 걸려 있니, 슬리퍼의 색깔은, 거울은 얼마나 큰 거니. 씻을 때 노래를 부르니, 부른다면 어떤 노래니, 어떤 타이밍에 어떤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니. 그리고 하필 왜 그 가사가 좋은 거니, 씻고 나오면 너의 고단함이 조금은 덜어지니. 잠옷은 어떤 색이니. 침대는 어디에 있니, 어떤 위치로, 어떤 높이니. 커튼은 어디서 산 거고 창은 얼마나 넓은 거니.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어떤 모습이니. 잠들기 전 보는 그 풍경이 잠시나마 너에게 위로가 되니. 어떤 모습인지 내게 그려줄 수 있니. 침대에 누웠을 때 제일 먼저 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니. 혹시 나이면 안 되니. 앞으로 그 사람이 나일 수는 없는 거니. 네 눈이 감길 때 모든 의식들이 잠들 때 그때 너의 숨은 어떤 소리니. 무슨 꿈을 꾸니, 너의 꿈속에는 누가 나오니. 네가 잠들 때 너의 방 안의 사물들은 어떤 모습인거니…… 어떻게 너를 지키고 있니…… 너의 그 방안에는…….
한 시간 남짓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알았다. 선배와 나 사이가 이전 같지는 않을 것이란 것을.
엘리베이터 사건 이후로 정말 선배와 나의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업무 시간에 종종 고개를 들면 나를 보고 있는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선배는 날 대놓고 쳐다본 것을 들켰으면서도 웃기만 하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지를 못했다. 나 역시 사무실을 걸어 다닐 때 마치 꿈속인 듯 붕붕 몸이 뜨는 것 같았다.
윤익 선배의 모든 행동과 말들이 나에게만 들리는 비밀스런 신호 같았다. 직장 선후배에서 연인의 관계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했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도저히 업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모든 신경이 선배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음식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과장이 내게 별것도 아닌 일로 쓴소리를 해댔지만, 그것이 나의 하루 컨디션을 결정하지는 못했다.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들이 생각났고 처음으로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히 결혼도 하고 싶었다. 회사 근처에 신혼집을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마트와 문화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니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살아도 괜찮겠다 싶었다. 물론 돈은 많이 들겠지만 둘이 살기에 집 평수가 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그런 망상에 빠져 있을 때 종종 눈에 들어오는 싼티의 모습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화장실에서 변기를 닦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내 안에서 뭔가가 스물스물 기어 올라왔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화가 나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고…… 그랬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런 건지 이유를 생각해봤다. ……아마 나와 그녀가 다르다는 것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 걸어갔던 길을 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 내가 평생토록 애써도 알지 못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그녀는 경험할 것이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흔적이 그녀의 영혼에 새겨질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알 수 없지만 대충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는 것이 불편했다. 화장실에서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는 게 싫었다. 나는 달라진 게 없었다.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눈앞에 두고도 내 안에서 회의와 의심들이 벌레처럼 기어 나왔다. 그러나 버려진 고양이들과 식물 나부랭이 속에서 싼티는 담담했다. 조용하고 고요했다. 물처럼. 햇살처럼. 싼티는 항상 보면 말을 잘 하지 않았는데 그저 그것으로 그녀는 충만한 것 같았다. 분명히 그녀와 나는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잊고 있었던,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잠시 덮어둔 것뿐이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악취를 풍기며 섞어갈 뿐이다. 싼티가 미운 날이면 내 심중의 밑바닥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끊임없이…… 그것은 귀를 막아도 내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