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1980년 이후 한동안 국정 전반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기관이 국군보안사령부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10·26 사태에 이은 12·12 쿠데타 등을 거쳐 대통령을 배출한 무소불위의 기관 아니던가. 언론 통폐합과 야당 인사 정치활동 규제, 민정당 창당 등 제5공화국의 강력한 집권 기반을 마련한 굵직굵직한 조치들이 모두 보안사의 작품으로 확인된 바 있다. 보안사령관 출신 대통령의 심복 기관이었으므로 소속 직원들은 사회 전반 속속들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국방부로 파견된 1981년 초는 대통령 7년 단임제와 간선제 개헌에 따른 제5공화국 출범 직전이었다. 국방부 직할이면서도 국방부 ‘감시’를 담당한 부대는 보안사의 100보안대였는데, 각 국·실(局·室) 단위로 한 명씩 출입했다. 정훈국의 경우 행사 때면 대통령과 동기인 육사 11기 국장(육군 소장) 옆에 보안사 직원이 자리하곤 했다. 현역 대령 아니면 행정직 서기관인 과장들보다 상석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 공군 제10전투비행단 관제반장으로 복무하다 국방부로 올라간 말단 소위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1981년 정훈국 야유회 때. 앞줄 오른쪽(모자이크 처리 된 인물)이 보안사 직원으로 추정된다. 앞줄 색안경 낀 이가 정훈국장, 오른쪽 제일 높은 곳 검은 옷 차림이 나.
그 직원을 처음 상면한 건 대통령 하명사업인 군가 제작을 위해 파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화홍보과 사무실 내 소파에 앉아 웬 늙수그레한 남성과 밀담을 나누던 과장이 날 부르더니 인사하라고 권했다.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사복 차림에도 ‘필승’을 외치며 차려 자세로 거수경례를 했고, 그 남성은 앉은 채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몇 번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그 남성이 간 후 옆자리 과원이 전해준 그의 신분은 ‘보안사의 정훈국 출입기자’인 육군 상사였다. 그날 공군 소위의 자존심에 크고 깊은 흠집이 남겨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