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처럼 Jun 09. 2024

<15> 질투는 가까운 사람을 향한다

<질투>

-공작새는 다른 공작새의 꼬리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하지 마라



시기심, 질투심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시샘하거나 공연히 미워하는 마음은 나쁜 감정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워낙 당연한 심성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물 한 방울 주지 않아도 잡초처럼 잘도 자라는 것이 질투심이다.


문제는 이런 감정이 불행의 대표적 씨앗, 혹은 뿌리라는 사실이다. 이를 적절히 걷어내지 않고서는 절대 행복을 맞이할 수 없다. 러셀은 저서 ‘행복의 정복’에서 “질투는 평범한 인간 본성이 가진 여러 특성 중에서 가장 불행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질투의 속성과 원인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가 하면, 그것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살아가면서 한 번도 질투심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러셀이 대신 대답하는 것 같다. “질투는 인간의 감정 가운데 아주 보편적이고 뿌리 깊은 격정이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시기심은 살아 있는 자에게서 자라다 죽을 때 멈춘다”라는 말을 남긴 것을 보면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


하지만 질투가 사악하고 비열한 감정임엔 틀림없다. 타인의 성공과 행운에 대한 부러움이 지나쳐 생긴 질투심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반대로 남의 실패나 고통에 대해 기쁨을 느끼는 감정은 악마의 심성이라 해서 틀리지 않다.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란 말이 당연한 것처럼 회자되고, 심리학에선 이마저도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인간이라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러셀은 질투를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일종의 나쁜 버릇이라고 봤다. “질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사물 사이 관계를 통해 보려는 습관에서 생긴다.” 그는 이런 예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큼 돈을 잘 벌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자기보다 뛰어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보다 두 배의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드는 감정이 대표적인 질투란다. 이때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만족감이 갑자기 희미해지고,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눈앞을 가린다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러셀은 “매사 비교하는 습관은 대단히 잘못된 버릇”이라고 했다. 남과 비교하는 습성을 버리지 않으면 비록 어떤 일에 성공한다 해도 질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진단했다. 비교하는 사람에겐 부러움이 끝도 없이 생겨나기 때문이란다. 역사적 위인들을 예로 들었다.


“명예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폴레옹을 부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카이사르를 부러워했으며.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부러워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틀림없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은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남과 비교하는 습관이 행복의 장애물이 되는 이유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즐거운 일이 생기면 그것을 한껏 즐기면 된다. 그러나 남에게 생긴 즐거움의 정도가 더 크다고 생각되면 만족감을 느끼기 어렵다.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면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고, 감사한 마음이 없으면 행복은 없다. 매사에 불만인데 어떻게 행복하겠는가? 비교는 스스로 행복을 걷어차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 행복의 출발점이라고 있겠다.


질투는 민주주의 발전과 SNS의 폭발적 성장으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더욱 심화하는 양상이다. 질투는 평등주의 격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에 추진력을 제공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발전된 민주주의는 평등의식 심화로 시민 전체의 질투심을 키우게 된다. 과거에는 고위 공직자가 일반 시민들보다 꽤 큰 복락을 누려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시민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모든 것을 똑같은 수준으로 누리지 않으면 불평불만이 생긴다. 


온라인 사회 관계망 서비스인 SNS는 질투의 대상을 온 세상 사람들로 확대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친척과 이웃 등 특별히 가까운 사람들만 질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상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대상이다. 질투의 대상이 무한정 많아지다 보니 세상사 모든 것이 불만이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 다니는데 남들은 유럽 여행을 자주 다니는구나. 나는 집 근처에서 외식하기도 벅찬데 남들은 호텔 뷔페를 수시로 드나드는구나. 나는 맨날 시장 옷이나 사 입는데 남들은 별 어려움 없이 백화점 옷을 사 입는구나.”


SNS의 폭발적 성장으로 과거에는 알 수도 없고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가만히 앉아서 파악할 수 있으니 비교는 저절로 이뤄진다. SNS를 즐기는 사람은 속성상 자랑하는 것을 좋아한다. 당연히 자랑거리가 있을 때 글이나 영상을 올리게 되고, 또 과장해서 올리는 경향마저 있다. 이런 것을 접하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은 초라해지고 만다.


러셀은 질투심이 어린 시절 성장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질투심이 보편적 심성이긴 하지만 유아기 때부터 바람직하고 세심한 환경을 조성하면 일정 부분 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에게도 질투심이 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생활할 때 분배의 정의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질투는 어린 시절에 겪는 여러 가지 불행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자기 눈앞에서 형제나 누이가 더 귀여움 받는 것을 본 어린아이는 질투하는 버릇이 몸에 배게 된다. 이런 아이가 사회에 나오면 자기가 희생양이 되는듯한 불공평한 대우에 불만을 갖게 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길 경우 금방 알아차린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상상하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러셀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도 같은 결과를 낳는다고 했다. 대부분의 아이는 형제자매의 편애가 없어도 다른 집 아이들이 자기보다 더 사랑받는다고 생각하면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그런 아이는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부모 사랑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데 대해 불만을 갖게 되고, 결국 자기 부모를 미워하게 된다. 이런 마음이 곧바로 질투심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질투심이 주로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향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성장 배경이나 환경에 너무 차이가 나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성공이나 행운에 대해서는 질투심이 생기지 않는다. 거지는 자기보다 조금 행복해 보이는 거지를 질투할 뿐 큰 부자를 질투하진 않는다. 사실 SNS 가상공간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느끼는 질투심은 그다지 크지 않다. 가상공간에서 빠져 나와 다른 생각을 하다 보면 금방 사라지곤 한다. 


하지만 서로 형편을 잘 아는 사촌, 절친, 동고동락하는 직장 동료에게는 쉽게 질투심이 생긴다. 한 배에서 난 형제자매 간에 격한 시기심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질투심이 경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수준이 비슷해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 사이에 생긴 질투심은 그 정도가 심하고 오래가는 경향이 있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 형제의 비극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형인 가인이 하느님에게 자기보다 더 사랑받는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은 오로지 질투심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가인의 후예여서 형제간의 질투심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성이 훌륭한 수도사 형이 동생의 출세를 질투했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악마가 금식 기도 중인 수도사의 기도를 중단시키기 위해 온갖 산해진미로 유혹하고 미인계까지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약이 오른 악마가 꺼낸 회심의 카드는 질투심 조장이었다. 악마가 수도사에게 “이번 교구 승진 인사에서 당신 동생이 주교가 되었다고 하네”라고 말하자 수도사는 벌떡 일어서며 “진짜야? 말도 안 되는 승진 인사야”라고 소리쳤단다. 


누구에게나 스며들 수 있는 질투심을 어떻게 차단할 수 있을까? 러셀은 정신을 수양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무욕을 실천하는 것이 최고겠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성자에게도 다른 성자들에 대한 질투심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결국 남과 비교하는 습성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훌륭하게 여기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공작새에게 ‘비교하지 않음’을 배우란다. 


“공작새들은 다른 공작새의 꼬리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공작새들은 저마다 자기 꼬리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공작새들은 온순하다.” 


인간은 공작새가 아니어서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행운을 부러워하지도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부러움은 시기나 질투에까지 이르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느껴도 괜찮다. 부러움은 성장과 발전 욕망을 촉진할 수 있는 좋은 심성이라 할 수도 있다. 부러움을 질투심 바깥에 머물도록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렴 질투는 아주 어리석은 감정이다. 맹자의 가르침은 울림이 크다.


“시기와 질투는 언제나 남을 쏘려다가 자신을 쏜다.”

작가의 이전글 <14> 왜 현대판 공룡이 되려고 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