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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용직 노동자가 꾼 20년
예술가의 꿈

-학업 성적이 형편없었던 외톨이 초등학생, 오귀스트 로댕

by 물처럼

*오귀스트 로댕(1840~1917) = 프랑스의 조각가, 화가. 근대조각의 아버지. 작품으로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입맞춤’ 등 다수.



위대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지옥의 문’은 무려 37년간의 노력 끝에 탄생했다.


40세 때인 188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장식미술관 정문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고 ‘지옥의 문’ 제작을 결심한다. 이를 위해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을 수십 번이나 읽었으며, 데생에만 꼬박 1년을 투자했다. 4년 뒤 전체적인 형태를 완성했지만 수정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24년 후, 장식미술관 건립 계획이 무산돼 프랑스 정부가 주문을 취소했지만 로댕은 작업을 계속했다. 등장인물들 사이에 새로운 인물을 추가하거나 위치를 바꾸는 등 수정작업을 거듭하느라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1917년 숨을 거둔다. ‘지옥의 문’은 미완의 작품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등장인물만 190명이 넘고 ‘생각하는 사람’ ‘입맞춤’ ‘웅크린 여인’ 같은 그의 유명 작품은 모두 여기에 포함돼 있다.


로댕은 ‘지옥의 문’ 제작에서 보듯 끈기의 예술가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것도 사실이지만 지칠 줄 모르는 열정,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소유자다. 작품 하나에 37년 동안이나 정성을 쏟는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학창 시절과 무명 조각가 시절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끈기의 힘이 있었기에 결국 성공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파리에서 하급 경찰관 아들로 태어난 로댕의 어린 시절은 어둡고 외로웠다. 군대 같은 첫 기숙학교에서 그는 말없이 혼자 구석을 지키는 외톨이였다. 교사들은 사회성이 부족한 로댕을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로 간주했으며, 아버지마저 “나는 바보 같은 아들을 두었다”라고 한탄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아이는 갈수록 더 위축되었다.


로댕의 학업 성적은 형편없었다. 수학과 과학 과목은 극히 부진했으며 받아쓰기, 라틴어도 많이 부족했다.


감각이 필요한 공부는 그런대로 소화했지만 논리적 추론과 계산력이 필요한 과목은 무척 힘들어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당시 인기 직업이던 공무원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결론짓고 목수나 양조기술자가 되길 희망했다.


하지만 소년에겐 미술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다. 14세 때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무료 미술학교인 프티 에콜(작은 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로댕은 외톨이였다. 그림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았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한 까닭에 혼자 학교 구석구석을 배회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모르는 방’ 하나에 들어갔다가 자기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평전 ‘오귀스트 로댕’(라르스 뢰퍼, 정연진 옮김, 예경, 2008)에 나오는 로댕의 회상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점토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팔, 머리, 발과 여러 작은 부분들을 만들어보고, 다음으로는 몸 전체도 만들어보았다. 나는 이 모든 작업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능숙함은 지금과 견주어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희열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 화가가 되고 싶었던 로댕은 이 무렵 조각가가 되겠노라고 단단히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17세 되던 해 국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의 입학시험에 도전하지만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만다. 동료 학생들을 모델로 만든 찰흙 작품을 제출했는데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 두 작품을 더 제출했지만 끝내 입학은 허용되지 않았다. 좌절감이 컸을 것이다.


엘리트 코스 진입에 실패한 로댕은 이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 20년 이상 건축업자나 실내 장식업자, 유적복원 책임자의 조수로 살아야 했다. 막노동을 참아내야 하는 일용직 근로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22세 때는 누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사제가 되겠다며 수도원에 들어갔다. 사실상 미술을 포기한 은둔 생활이었다. 그러나 수도원 신부들은 그에게서 미술적 재능을 확인하고 환속을 권했으며, 결국 로댕은 2년간의 수도원 생활을 청산하고 일용직 노동자의 삶으로 돌아온다.


조각가로서의 성공은 멀고도 험난했다. 24세 때 ‘코가 찌그러진 사나이’를 만들어 파리살롱에 출품했으나 낙선했다. 지나치게 사실적인 묘사가 혐오감을 준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거부 이유였다. 30세 때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일감이 떨어져 벨기에로 건너갔다. 수도 브뤼셀에 들어설 증권거래소를 건축하기 위해 공예가, 석공, 조각가들을 모집했기 때문이다. 6년간의 벨기에 생활은 고생이 적지 않았지만 조각가로서의 실력이 제법 뚜렷하게 드러난 시기였다.


이곳에서 제작한 남자 누드 조각 ‘청동시대’의 경우 로댕을 성공가도에 들어서게 만들었다. 작품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진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벨기에 미술 비평가와 파리 살롱에서 “조각이 아니라 실제 모델의 본을 뜬 주조 같다”라고 비아냥했지만 그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40세 때의 일이다. 그가 필생의 작품 ‘지옥의 문’ 제작을 시작한 때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일용직 노동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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