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의지
수능을 다시 보고 다른 학교를 다니기로 했다. 문제를 아직까지도 직면하지 못하고 있었고,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 때문에 괴로운 것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강의를 듣고 실습을 하면서 문제를 일으킨 것도 많았고, 출석 점수도 채우지 못해 이미 성적도 바닥이었으니 다시 학교를 다니기도 힘든 상태였다. 수능을 앞두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의원을 찾았다. 별 얘기할 것도 없었다. 원래 약을 먹었고 수능을 봐야 하니 약 좀 주세요. 그 병원은 1년 반을 다녔다.
수능을 본 후 새로 들어간 대학을 다녔고, 스무 살부터 계속 해오던 아르바이트를 했고, 집 근처에서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했고 짧은 아르바이트 하나를 더 소개받았다. 첫 아르바이트로 학원 조교를 하다가 강의를 시작했으니 그 뒤에 새로 구한 일들도 학원 아니면 과외였다. 주말에는 종교단체에서 주일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가끔 일정이 맞을 때는 청소년 수련원에서 청소년지도사 보조를 했다. 사실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주로 대학 생활을 집중적으로 망쳤다. 강의 중에 병증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지만, 자연스레 학교에 가는 횟수가 줄었고 과제를 제출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지쳐있었다. 틈틈이 아이돌을 보러 방송국이며 행사를 찾아다니는 취미생활까지 했으니, 견디지 못할 만했다. 나는 무언가 하나씩은 그만둬야 한다는 걸 몰랐다. 학교를 다니기 싫어서 도망치려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많은 일을 했고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었고 항상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약을 본격적으로 남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었다. 한 달 정도 약을 먹지 않으면 300 정이 넘는 약들이 모였다. 정신과 약들은 어쩜 그렇게 다 조그마한지. 새끼손톱 반만 한 그 약들은 한꺼번에 100 정씩도 삼킬 수 있었다. 그럼 한 사흘은 기억이 없었다. 첫날은 정신없이 잠만 자고, 둘째 날부터는 흐릿한 정신으로 학교도 가고 일하러도 갔다. 모아둔 약이 없어서 약국에서 산 진통제들을 과량 먹었다가 위염에 시달리기도 했다.
감정 조절을 하기 어려웠다. 뭔가 치솟는 기분이 들면 칼을 들고 손목을 그었다. 처음엔 손톱으로 쥐어뜯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마저도 소용없었다. 흉터가 남지 않을 정도로 얕게 긋던 습관 때문에 가끔 너무 흥분했을 때는 속살이 보이고 수십 분을 지혈해야 할 만큼 깊게 긋게도 됐다.
함께 취미생활을 하던 친구가 같이 죽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함께 술을 마시며 많이 울었고 날짜를 정했다. 방법을 알아봤고 준비를 마쳤다.
우울증이 나아지면서 깨달은 게 있다. 사람들은 우울증 치료에 가장 중요한 건 환자의 치료 의지라고 말한다. 한창 아프던 시절엔 그 말을 들으면 짜증이 났다. 시발 그러면 안 낫고 싶은 사람이 어딨는데. 이렇게 괴로운데 누가 안 낫고 싶냐고.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우울증이 나아지면 삶을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 지속적으로 정신건강을 관리해가면서, 언제 끝이 올지도 모르고 계속 계속 살아나가야 한다. 치료의지를 가지라는 것은 그걸 받아들이고 원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게 없었다. 그냥 삶 자체가 고통이었으니, 모든 것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죽음으로 모든 것들을 끝내고 싶었다. 살아 나갈 의지가 없었다. 치료 의지가 없었다.
닷새의 기억이 날아갔다. 정신을 차린 곳은 보호병동, 흔히들 폐쇄병동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