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고 싶은, 고를 수 있는

by 창문밖일요일

교환학생 시절 소통에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내 귀찮음을 영어로 표현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습관처럼 꺼냈던 "귀찮다"라는 말이 머릿속 번역기에서 턱 하고 걸렸을 때,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마땅히 풀어서 할 설명도 없었다. 귀찮음은 한국인만 느끼는 걸까? 주체할 수 없이 넘치는 에너지로 내 방문을 노크하는 막 20대가 된 룸메들의 머릿속에는 아예 '귀찮음'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았다.


급한 대로 네이버에서 '귀찮다 영어로'를 검색하고 표현들을 찾아봤다. "귀찮다"를 대신할 수 있는 정중한 거절의 표현들은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 감성이 아니었다. 귀찮다는 귀찮다여야만 했다. 피곤한 것도 아니고, 성가신 것도 아니고, 그런 기분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귀찮은 건 그냥 귀찮을 뿐이다.


나는 몇 번의 설득 끝에 항상 못 이기는 척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고, 귀찮아를 중얼거리던 게 민망할 정도로 신나게 놀았다. 참 이상한 동네였다. 낮에는 거리를 거닐면 어르신들 밖에 안 보이는데, 밤이 되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모르겠는 젊은이들이 클럽과 술집에 모여있었다. 나도 차츰 그들과 하나가 됐다. 학교를 갈 때 외에는 낮 시간 동안 잘 숨어 있다가, 달빛과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여전히 귀찮았다.


그럼에도 그 밤들이 좋았던 이유는 항상 음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이른 저녁에 거리를 나서면 이름 모를 음악단이 연주를 하면, 그 리듬에 맞춰 우리 엄마 아빠 연세의 어르신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저 무리에 섞여서 춤을 추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또 그곳이 어디든, 술을 팔고, 손님의 절반 이상이 20대라면 레게톤이 나왔다. 아. 정말 지겹지만 그리운 레게톤. 밤새도록 그 흔들거리는 리듬이 반복되는데, 어떻게 스페인 사람들의 엉덩이가 남아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레게톤이 가득한 술집에서 벗어나, 브라질 친구들의 집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음악을 골랐다. 나는 종종 한국 음악을 틀고는 했다. 대부분 반응이 좋았지만, 특히 친구들은 검정치마 노래를 좋아했다. 나도 그렇고, 익숙하지 않은 노래를 처음 듣고 반응할 때는 친절함과 예의가 어느 정도 함유되어 있다. "오! 아이 라이킷!" 정도의 마일드한 표현. 그런데 검정치마의 노래를 틀면, 그런 요소가 거의 함유되지 않은 순수한 리액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오... 씻..." 같은 표현. 우리는 그렇게 매일 밤과 어울리는 노래를 고르며 어울렸다.


그때 느꼈다. 음악을 고르는 것은 내게 확실히 귀찮지 않은 일이구나. 그리고 음악을 고르는 것은 내가 가장 어렵지 않게 내 삶을 연출할 수 있는 힘이다. 고르고 싶고, 고를 수 있는 것.


밥 싱클레어의 'Love Generation', 검정치마의 '폭죽과 풍선들'과 같은 노래들을 들으면 그날들의 낯선 공기와 참 신기하게 빛이 번지던 거리가 떠오른다. 그 순간에 맞는 음악을 고르는 것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나만의 독특한 기억법이다. 음악으로 기록되는 나의 이야기들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환희와 슬픔이 공존했던 나의 2020년부터 품고 있던 작은 소망이었다.


나는 '통제감'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행복에 대한 정의는 수백, 수만 가지가 있을 테다. 우리 모두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전제 하에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곧 그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 더 나아가 라이프스타일을 의미하지 않을까. 아직은 행복을 정의하기에는 내공이 부족하지만, 분명 나의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는 통제감이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통제감. 내면, 행동,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자신이 통제권을 갖고 있다고 믿는 믿음. 내 삶에 대한 통제감이 약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음악을 고른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내용이다. 귀찮은 것이 너무 많은 2020년대의 한 20대가 자발적으로 음악을 고르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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