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 코모리: COVID-19와 히키코모리를 합친 합성어로,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반 강제적으로 집 밖을 나가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가지 마 내 숙면
미처 알지 못했다. 나의 숙면이 한국에 돌아오기 전 셰어 하우스에서의 2달로 끝이 나게 될 줄은.
코로나는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내가 처한 상황에서는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딱히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긴 했지만, 늘어가는 확진자들의 소식과 미국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 폭동에 대한 뉴스를 전해 들으며 괜한 심리적 압박만 커져가고 있었다. "나 미국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 겨우 얻은 유학의 기회를 완전히 온라인으로 퉁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복잡했던 마음 상태에 우울함을 던져 주었다.
그 우울은 곧장 내 잠을 방해했다.불면증을 이해하는 방법은 아마 직접 겪어보는 것 외엔 없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해보려 해도 온 몸의 감각만 예민해질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겨우 잠이 든다 싶다가도 1분도 안 되어 어디서 들리는지도 모를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다시 정신이 말짱해지기를 반복. 머릿속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이질 않았다. 몸은 피곤한 것 같은데 신경은 예민해져만 가고, 그런 날이 계속될수록 점점 더 밤이 다가오는 게 부담스러워져만 갔다.
잠귀가 밝고 예민한 나와 달리 남편은 머리만 대면 숙면으로 곧장 빠져드는 복 받은 사람이었다.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새벽을 곱씹다 보면 종종 남편의 웅얼대는 잠꼬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세상모르고 잠든 신랑의 얼굴을 보며 "부럽다." 말을 하면 가끔 대답을 해주기도 했다(본인은 모른다). 동이 틀 즈음이 되어 잠에서 깬 남편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당황스러워했다. "또 못 잤어?" "응." 그리고 그런 날은 시간이 갈수록 잦아졌다.
한동안은 약의 힘을 빌렸다. 꽤 많은 인구가 밀집해 지내는 아파트 단지라 인근엔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설과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걸어서 15분, 20분 즈음 가다 보면 보이는 자그마한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처음에는 며칠, 다음에는 일주일, 이후에는 한 달 치 약을 처방받기에 이른다. "많이 드시면 안 돼요. 정말 힘들 때만 드세요, 아셨죠?" 인상 좋으신 의사 선생님께서 우려하는 눈빛으로 신신당부를 하셨다. "네 그럼요, 힘들 때만 먹을게요."
선생님의 우려가 무색하게, 약을 길게 복용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걸 머지않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약 기운으로 밀린 잠을 몰아 잔 뒤 컨디션이 좀 회복된 것 같아 바로 복용을 중지했더니 곧 부작용이 찾아왔다. 약을 먹지 않고 견디는 밤이면 이전엔 없던 초조함이 밀려오고 복용 전 보다 더 예민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수면제 부작용은 집에만 있어 맘이 약해진 내게는 좀 더 쥐약 같은 존재였다.
신랑은 무기력해진 나를 집 밖으로 끌고 나가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씩 함께 돌기 시작했다. 운동으로 지치면 잠이 올 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잠은 오다가도 말고, 보이다가도 멀어져만 갔다. 너무 괴로워 수면제를 반 알씩 먹기도 했지만, 약을 끊으면 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약을 계속 먹을 수도 없었다. 정말 이대로 꿀잠은 영영 안녕인 걸까(가지 마 내 숙면).
마음 같아선 어디든 원할 때 원하는 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었다. 남편 쉬는 날만 기다리며 약속을 잡고 계획을 짜서 나가는 것 말고(군에서 휴가나 외출을 허락받은 날이면 나를 데리고 인근 카페, 시내에 나가려 노력한다. 시내까지는 차로 4~50분이 걸린다),나는 그저 내가 원할 때 아주 소소하고 평범하게 바깥을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걸. 결국 본의 아니게 이불 밖은 위험해를 시전 하며 이번에도 이 안에서 불면증의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