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네가 죽지 않았으면 한다,

죽지도 죽이지도 못한 이에게 보내는 장

by 이닻

쏟아지는 수십 쌍의 눈. 너를 비웃고, 멸시하고, 소외하는 검은 돌멩이들. 창백한 표정의 너는 피 흘리는 사람처럼 멍하니 그 장면을 되풀이하곤 했지. 흔들리는 버스 차창에 그런 네 모습이 자주 비쳐 있었다.


너의 정면을
보지 못하는 나의 흰 눈동자
찌그러진 타원형의 바깥들에 매달려
계속해서 바깥이 되어가고 있겠지
검은 우주처럼
- 하재연, 행성의 고리


선물이랍시고 받았던 시에서는 거꾸로 뒤집어도 네가 읽혔다. 눈을 맞추는 일이 두려워 정면을 보고 마주 앉는 것보다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것을 좋아한다던 네가. 사나운 시선들의 바깥에서 20년 넘게 떠도는 동안 네 우주는 잔뜩 검어지고 광활해져서, 이제 너는 아프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왈칵 응답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저 묵묵히 같은 궤도를 밟아 걸었지. 이어갈수록 그 궤도는 눅진 짙어져 다시는 모양이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아. 영원히 너는 그 밤을 홀로 유랑하다 깊이 사라질 것만 같아.


우주 쓰레기처럼 난잡하게 부유하는 불행의 편린들과 부딪힐 때마다 악몽을 꾼댔지. 식은땀에 절어 미끄러운 너의 목덜미를 붙들고 소원했다. 제발 나를 그 꿈속에 초대해 달라고, 나도 네 불행의 부품으로 소비해 달라고, 무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야.


❝ 어제는 내가 내 허벅지를 칼로 찔렀어요.


허벅지 위에 그놈 얼굴이 놓여 있었다고 했니. 너를 바닥에 깔아뭉개고 넥타이를 조이던 얼굴, 감금하고 구타하던 얼굴, 멀겋게 웃다가 벌겋게 불타던 얼굴. 죽으라고, 아주 죽어버리라고-한참 난도질하고 나면, 어느새 사정없이 조각 나있는 것은 핏물 튄 제 얼굴이라고 했다. 백지장 같이 하이얀 손은 누구도 응징하지 못해서 냅다 자기 연민 뒤로 숨어버린다. 부러질까 봐 덥석 잡아주지도 못할 홀쭉하고 유약한 손.


무얼 하고 싶은 것이냐고, 너는 칼을 쥐어주듯 묻지. 무얼 할 수 있느냐고 물어봐주지 그랬어. 너를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겠느냐고. 곧장 칼끝을 내 허벅지에 벼를 수 있는 내 앞에서 너는 밍밍하게 웃어 보이고. 진심이었는데, 멍든 자국에 날계란을 빙빙 돌리듯 그대로 허벅지에 문질러 뭉개버렸어. 나는 너를 업신여긴 사람이 되어 무력하게 안쪽으로 밀려난다. 행성도 고리도 아닌 어중간한 허공에 둥둥 버려진 채.


이럴 거면 왜 시를 보냈어. 아무짝에 쓸모없는 문학 쪼가리였을 뿐이라고 잡아뗄 참이니. 시 읽는 사람에게 시를 보냈잖아. 사람을 읽으라고 보냈잖니. 종이 한 귀퉁이에 간신히 매달려있는 불우한 마음을 잘근잘근 음미해 달라는 요청이었음을 모를 리 없는데도. 숨지 마. 너는 복잡하게 암호화된 너의 현재가 내게는 단번에 해독 가능한 언젠가의 과거임을 모른다. 그러니 나를 여기 버려두지 말아. 끌어오지도 끌려가지도 못하는 이 간극에 나를 내몰아 놓고 혼자 악몽 속으로 돌아가지 마.


네가 왜 호수에 오고 싶어 했는지 알아
바다는 파도를,
숲은 나무를 반복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서
- 양안다, 로스트 하이웨이


네가 나를 너에게서 제외시켜 문밖에 가두어버린 어떤 날로부터, 나는 줄곧 폭우를 맞으며 거기 서 있었다. 시위랍시고 보낸 시가 마침내 너를 불러냈지. 너는 익사하다 만 사람처럼 숨을 몰아쉰다. 여전히 나의 눈과 마음이 아닌 어느 모호한 지점을 응시하면서. 아직도 불이 붙어 있는 시구를 한 손에 꼭 쥐고 있다. 아무리 찬물을 끼얹어도 너는 결코 꺼트리지 못할 불이야. 제 아무리 깊은 슬픔의 구정물 밑바닥까지 잠수해 버려도, 끝내 온몸으로 헤집고 들어가 너를 발견해 내고야 말 횃불이야, 나는.


나는 너보다 겁이 많았어.


혈관 사이를 벌레처럼 넘나드는 분노와 자기혐오에는 단 1센티도 접근하지 못했지. 칼날은 지나치게 날카로웠고, 피의 물성은 공포였거든. 손목을 걷어 보이자 네가 호흡을 끊는다. 그때였을까, 불현듯 너의 동그랗고 검은 우주가 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거야. 죽음을 수차례 다짐만 한 실패자들의 기척이었다.


그들은 내 멱살을 잡아채지도 못했어. 나의 존재성은 내 손에서 가장 먼저 죽었으니까. 사방에서 조여 오는 침묵에 아무도 모르게 오래도록 질식했을 뿐이야. 불균일하게 일그러지는 세계로부터 튕겨나갈까 봐 숨죽여 구석을 찾아다녔지. 내가 없는 줄 알고 무수히 파생된 욕지거리들만 발 언저리에 그득 쌓였어. 그뿐이야.


무얼 하고 싶은 것이냐고 했어? 나는 그냥 네가 죽지 않았으면 한다. 영영 실패를 반복하고 결국 삶으로 내동댕이쳐졌으면 해. 진정 죽고자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매일같이 혀를 쭉 잡아 빼고 비명을 소각하면서라도 살아만 주었으면 한다. 내 바람이 가혹해? 네가 쥐어준 칼을 조각내어 씹어보일게. 어쩌면 설익은 행복을 삼키는 일이란 칼을 넘기는 일과 같을지 모른다. 나도 알아, 당장 행복해지라는 게 아니야.


그저 다음 여름까지만, 조금만 더 넘겨 가을까지만 살자. 장마를 견디는 일은 내가 할 테니 우리 추수 때까지만 보기로 하자. 네가 물러 터지기 직전에 놓아줄게. 그때 다시 선택하기로 해. 그때쯤에는 네가 잘 익은 과실을 즐거이 먹어치우고 남은 씨앗을 심어볼는지, 아니면-다시 절벽 아래에 죽지도 죽이지도 못한 세계를 매달러 간다고 해도 막지 않을 테다. 어디로 가든지 네 발 앞을 활활 비추어 줄 거야.


그러니까 해줄 거지. 조금만 더 게을러지는 일을. 다짐을 유예하고, 실패를 앞당기는 일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백만가지다. 너없이 계절을 건너온 나는 그래. 부지런해지는 것은 이제 나의 몫. 너는 당분간 행복만 해. 제쳐두고 행복만.


그럼 이만, 줄일게.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