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지 않고 늙는 기억에게 보내는 장
좋은 아침이에요. 실상은 아침도 아니고 아침에 기분이 좋기도 어렵지만, 문안해 봅니다. 어쩌면 모든 안부는 응원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하는 칭찬이 실은 좋은 사람이 되어주세요, 하고 북돋아주는 일에 가깝듯이요.
갑자기 묻고 싶어져서 그런데, 그때 그 복층 방에 살던 소녀는 떡잎부터 글렀었나요?
아무도 안녕이든, 염원이든 빌어주지 않았어요. 그 누구의 기대도 먹고 자라지 못해서 늘 낯빛이 어둡고 등은 굽어 있었어요. 물론 채광이 안 좋은 탓도 있었지요. 불을 켜도 티가 나지 않아서 꺼놓고 지냈어요. 창을 열어 놓으면 창문이 LED 액자처럼 번쩍거렸는데, 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물체 같았달까요.
햇빛과 더 근접한 높이에서 지나치게 밝은 도로와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서면, 그대로 고꾸라져 떨어져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답니다. 어차피 어둡고 불운한 생명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듯했어요. 하굣길에서 종종 발견되는 죽은 쥐 시체처럼, 뜨겁고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서서히 스며들지 않을까. 파리 떼가 엉겨 붙고 냄새도 조금 나겠지만, 그게 나인 줄은 모르지 않을까.
가끔은 가족들도 그 방의 존재를 잊은 것만 같았어요. 종일 방 안에 있으면 거실과 옥상을 계단으로 오가는 소리가 훤히 들렸는데, 중간에 멈추어 서거나 두드리는 일이 일절 없었기 때문이에요. 벽속에 숨어 사는 벌레처럼, 나는 나의 상상을 스스로 갉아먹으며 연명했어요.
실은 나 정말 벌레일지도 몰라. 그레고르처럼! 그래서 모두가 싫어하고 기피하는 걸까? 그래서 어느 부류의 무리에도 속하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어깨가 자꾸 앞으로 굽고 고개를 들고 다니기 어려운 걸까?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면 죽을 것만 같이 공포스러운 걸까? 그래서 이렇게 방에 격리되어 죽어가도록 운명 지어졌는데, 인지하지 못하는 중일지도 몰라. 모두가 그러기로 동의했는데, 나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
답을 찾기 전에 다섯 번째 이사를 갔던가요. 다행히 해충은 아니었는지, 새 집에서는 동생과 한 방을 쓰게 되었어요. 우리는 서로를 잡아먹을 수 있을 듯 싸웠지만, 끝내 서로에게서 살아남았습니다. 차차 성인이 되었고, 차츰 그때 이야기를 하지요. 복층집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언제나 추억의 시점은 그 이후부터였어요.
이제는 정말 아무도 모를 텝니다. 당신을 허물고 아파트를 새로 지었으니까요. 복층 구조의 빌라형 주택이 오순도순 모여있던 작은 동네에, 우악스러운 풍채를 떨치며 들어선 신축 고층 아파트 단지. 그 풍광이 얼마나 이질적인지, 감히 설명도 못 할 거예요.
사람이 오래된 건물을 보러 가는 이유는 변하지 않은 무언가를 통해 변하기 전의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해요. 아무리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인간은 매 순간 다소 급진적인 열교와 냉교를 번갈아 겪어야 하기에 기본적으로 혼란스럽잖아요. 어딘가에 나조차 잊은 나의 한 조각이 오래도록 남아있다면, 그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것이겠지요.
당신이 철거된 자리에 묻힌 숨 냄새만으로도 충분했어요. 뭉개졌던 감각을 아주 단순하게 일깨웁니다. 할머니 서가에서 몰래 빼내 온 책들, 페달이 삐걱거리던 피아노, 자투리 글로 빼곡히 채운 수십 권의 연습장들, 외울 때까지 돌려 들었던 영어 동화 CD, 언젠가 영어 쓰는 나라에 가서 살겠다는 당돌한 꿈과, 불면에 절어 지껄였던 숱한 저주의 잠꼬대, 그 모든 사소하고 오래된 것들을 한데 곱게 갈아 빻은 냄새였어요. 텁텁하고, 눅눅하고, 보드라운.
늙음의 냄새. 낡음과 늙음은 공공연히 혼용되는데, 심지어 영어는 두 단어를 달리 구분 짓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늙지 않고도 낡는 것이 있고, 늙더라도 낡지 않는 것이 있으니 분명 다르지 않나요. 시간이라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못 이겨 늙는 것은 그 고유함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반면 빛바래고 침식된 것은 낡아요. 생명력을 빼앗긴 상태가 되지요.
Dear my Nostalgia, 무수히 거쳐간 그 많은 집들 중에 주소도 남지 않은 당신이 내 안에서 가장 잘 보존된 기억이라는 사실을 믿나요. 당장이라도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요. 서술하고 보면 철거되어 마땅한 기억이었음에도 불구하고-도리어 소녀의 가장 긍지 있는 머릿돌이 되었으니 참으로 혼란한 일입니다. 혹 누군가는 남몰래 소원해 주었던 걸까요.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아침을 맞으라고요.
덕분에 소녀는 커서 영어 쓰는 나라에 살러 갔어요. 여전히 책을 읽고, 피아노를 치고, 글을 쓴다네요.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되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담벼락 너머의 세상을 넘어다보는 일을, 누군가의 떡잎을 열심히 닦아주는 일을 꿈꾸고 있어요. 생동하고 있어요. 생명력을 빼앗겨본 적 없는 사람처럼, 다시는 낡아빠져 파손되지 않을 것처럼, 오래오래 함께 늙어갈 기억들을 곁에 두고서.
어쩌면 향수는 그리움의 정서만은 아닐지 몰라요. 그리움이란 과거를 향해 있지만 현재에 머무르는 것이니까요. 말하자면 경험하고 감각된 기억 자체가 그리운 게 아니라, 그 기억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상징적 고통을 윤색한 것일 수도 있지요. 변색하는 사람이 되어 변치 않은 것을 찾아가는 마음이 하필 고통스러운 기억을 선택한다면요. 그것은 돌아가지 못하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스러워지기 위해 돌아가는-그렇게 새로이 마주한 낯선 고통과의 괴리를 해결하는 일종의 생존법이 아닐까요.
생각이 많은 것은 나의 고유함 중 하나입니다. 개중 몇 개는 날을 미뤄가며 길어지지요. 하지만 더는 불면에 쫓기지 않아요. 우울 속으로 되려 침잠하는 법을, 그렇게 과거를 속단하고 일어나 현재를 속죄하는 법을 배울 뿐이에요.
당신은 물밖에선 볼 수 없지만 얼굴을 담그면 언제나 그 아래 박혀 있는 물풀처럼, 시공간을 넘나드는 곳에 언제까지고 있을 건가요. 또 보러 올게요. 내가 나를 견딜 수 없게 되면. 간밤에 싸매둔 단열재가 또다시 흘러내리면. 요란하게 진단받고 싶지 않은 새벽, 혹은 이른 아침, 그때쯤 문안할게요. 벌레의 걸음으로 살금살금, 그러나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럼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