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언제나 아빠였던,

아빠에게 보내는 장

by 이닻

❝ 너무 큰 꽃은 징그럽고 무서운 구석이 있어.


두 손에 다 쥘 수도 없을 만큼 만개한 수국을 보며 나누던 대화의 끄트머리. 큼지막한 보랏빛 머리를 흔드는 꽃의 다른 이름은 봄이었습니다. 한낮의 열을 식히며 오래도록 걸어도 추워지지 않는 봄밤에, 오래도록 곁에 있던 당신이 그랬습니다.


수국, 해바라기, 봉오리를 탈피한 목련, 그런 꽃들은 무섭다고 했습니다. 이팝, 산수유, 안개꽃처럼 작고 빽빽한 꽃들이 더 어여쁘다고 했습니다. 수국의 얼굴에 마음을 빼앗겨 멈춰 섰던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긍정하고 보는 버릇, 당신에게서 배운 배려 방식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우리는 매일같이 집 앞 공원 한 바퀴를 걸었습니다. 봄이 눈에 띄게 짧아지는 까닭이었고, 함께 나란히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차츰 멀어지는 까닭이었습니다. 밤을 걸으면서도 내일 낮에는 이팝나무를 보러 오라는 약속을 쥐어주던 당신. 봄 늦게 흐드러져서 가장 긴긴 달을 버티는 흰 꽃 무더기를 꼭 보러 오라고, 봄이 아주 다 갈 때까지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눈에 꽉꽉 채워 넣으라고, 햇빛도 충분히 쐬고 다시 무럭무럭 자랄 양분을 넉넉히 챙겨 돌아가라며.


그날의 당신이 문득 떠오른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너무 큰 꿈 또한 징그럽고 무섭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무렵. 그렇게 커다랗고 화려한 얼굴일랑, 양손에 받쳐 들고 똑바로 마주 보기 겁날 것 같았습니다. 그럴 줄 알면서도 큰 꽃이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몇 년 후의 봄이건 걸맞은 이름을 피워내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놀라지도 않고 잠자코 들었습니다. 곧 온 주름살을 부끄럼 없이 구기며 웃어주리란 걸 알았습니다. 내가 아껴 마지않는 당신의 얼굴 그대로-삶의 모든 순간에서 '웃어서 행복해지는 삶' 따위를 믿는 위인이었으므로.


❝ 어차피 시들 운명인 건 모두 다 똑같아. 무슨 꽃이 되려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다만 그러려면 온갖 무섭고 징그러운 기분들을 견뎌야 할 네가 걱정될 뿐이야.


발에 열이 많다는 이유로 슬리퍼만 고집하는 내 앞에 당신이 아픈 허리를 숙입니다. 종아리까지 오는 긴 양말을 손수 신기고야 마는 것입니다. 나는 가만히 당신의 발바닥을 생각합니다. 씻고 나오면 늘상 거실 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발바닥을 살피던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미 자못 바싹 닳아버린 당신의 발바닥은 어찌합니까. 나는 왜 이만큼 커서도 양말 한 짝 신겨주지 못합니까.


조금만 더 쉬웠더라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모든 것이 정말이지 조금만 더 수월했더라면. 안개꽃처럼 희고 멀겋게 웃는 당신의 목을 끌어안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그만 웃을 때까지 울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 조그만 응원으로 나를 빽빽하게 감싸 안아주겠다는 것이 다음 약속인 탓이었습니다. 점점 작아지는 당신이 남은 인생을 한 자락 더 팔아서라도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내 눈을 가려주겠다고 자꾸만 결심했습니다.


❝ 해줄 수 있는 게 이 정도라서 미안해. 이것밖에 못 해줘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 아니야, 어린 날 당신이 집요하게 가르친 말이었습니다. 당신이 더 많이 말하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리 웃음으로 속여 건네면, 깜박 모르고 맞장구 칠 만큼 나는 어리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모르는 것보다 모른 척해야 할 것이 더 많은 나이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지금껏 언제나 아빠였던, 내가 아이일 때나 아직 소녀일 때나, 기어코 어른이 되고야 말 때에도 내내 아빠일 당신은.


오늘도 나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웃네요. 당신이 아이였을 때, 소년이었을 때,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그 어느 때에도 여전히 딸인 적 없던 나는 따라 웃을 수조차 없습니다. 영원히 당신의 웃음과 울음과 후회와 사죄와 응원을 먹고 살아남을 테니까요. 남은 웃음이 다할 때까지. 마침내 성한 울음이 서로에게 전염될 때까지.


미안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내 곁에 있어주시겠어요? 정말 해낼 수 있을 것처럼 온몸으로 눈앞을 가려주시겠어요? 내가 돌아와 당신을 있는 힘껏 껴안아줄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어른이 되고야 말 때까지. 있어주세요. 나와 함께.


그럼 이만, 줄입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