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여도 좋다는,

우리 아닌 우리에게 보내는 장

by 이닻

늘상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다. 그대들이 피곤한 몸뚱이를 이끌고 테이블 앞에 앉으면. 해처럼 달처럼, 그 자리에 기어이 나타나서, 잔뜩 기울어 자전하는 나를 끌어당길 때마다. 반복은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그래서 숨을 참을 만큼 좋았다가, 답답해지고, 따분해지고, 그래서 숨이 막히도록 무서워진다.


서로 그간 어떻게 살았느냐고 안부를 나누는 것이 우리의 오래된 전통. 의미 없는 How are you와 같아, 그건 간단히 대답할 수라도 있지. 누구 하나 자신 있게 대답하는 법이 없어. 죄지은 사람들처럼 머뭇대는 사이, 결국 떳떳함을 뒤로 숨긴 누군가가 못 이기는 척 입을 연다. 봇물 터지듯 고해성사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면서 곧잘 자복한다.


우리가 우리였던 그 옛날의 오래된 습관이었어. 같은 언어를 나누어 쓰면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줄 알았던. 농담이 통하면 마음이 통한다고 믿었잖아. 술을 권하면 꼭 한 명은 시험에 들었지만, 계절을 섞어 마시면 감기인지 일사병인지도 모른 채 함부로 앓았다. 옳고 그름 사이에서 마구 취해있기 일쑤였다. 적나라하게 젊고 어지러운 그대들과 나의 현장.


까무룩 정신을 잃을 때까지 열심을 다해도 내일의 균열이 오늘의 최선을 쉽게 삼키니, 옳고 그름이란 영영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영원히 누구의 앞에서든 떳떳해질 수 없는 거야. 영원은 너무 길어서-살았다 믿은 순간도 다시금 추락할 수 있고, 살렸다 싶은 사람도 다시금 고비에 들 수 있고, 굳혔다 싶은 믿음도 다시금 깨부술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거든.


❝ 이 만남이 모두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사는 게 결코 헛되지 않다는.


헛되지 않다. 그 말은 진정 걱정이기보다는, 패배감을 견딜 수 없어 주워 먹던 아편이었다. 끊은 지 한참이다. 왜 헛되지 않으면 안 돼, 안달할 수 없어 눈동자만 서러이 기운다. 헛된 길일지라도 기어코 살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헛되지 않기 위해, 또는 헛되게 될까 봐 번성하는 소망은 어떻게 금해야 좋을까.


그래, 위로가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알아. 어쩌면 믿어도 좋을 것이라곤 그뿐이라서, 서로 다른 소란을 삼키고 공전은 계속된다. 계산해서는 도무지 밝혀낼 길 없는 궤도 안에서. 그저 사랑을 하자고 했지. 그냥 부딪히면 부딪히는 대로 일일이 안아주기로 했지. 여기서 아무나 튕겨 나가도 우주에는 주름 한 줄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들 중 누가 우리였던 우리였는지 더는 식별할 수 없어도, 가만 끌어안고 있으면 어느새 함께 졸음을 맞이하게 될 거야. 나란히 잠이 온다는 건, 함께여도 괜찮다는 것 아닐까. 우리가 우리여도 좋다는 뜻 아닐까.


우린 알 수 없는 세상을 헤엄쳐 가는 사람들
우린 알 수 없는 사랑을 헤아려 가는 사람들
이해 없는 눈으로 서로를 안아줘
이해 없는 몸으로 서로를 안아줘
- 예람, 우리는


노래를 소개하는 심정으로는 울고 싶기 십상이다. 그대들은 더 이상 권면으로 움직이는 삶들이 아니니까. 나 또한 그래. 이제는 누구의 곁에 누워야 편히 잠들 수 있는지 아는 탓이다. 우리는 이제 쉬이 감상에 동화되지 않는다. 매일 또다시 주어지는 기회의 반복에 감복하기 어렵다. 실패에는 무감해지고, 다친 곳은 끝도 없이 덧나서, 구태여 비장하지 않아도 혈서는 쓰였다.


갑자기 추워지는 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갑자기 사라지는 마음에는 한숨을 나눠마셨다


마냥 독해지는 건 방법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럴 필요가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무엇도 기약해 줄 수 없어 무거워진 입술을 뚫어져라 기다리는 그대들. 그래서 왔다. 버릇처럼 도지는 회피를 이기고 무작정 와서 앉았어. 정해진 약속을 지키기도 하고, 간혹 와달라는 말에는 정해진 약속을 깨서라도 간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마음 대신, 춥게든 덥게든 안을 수 있는 몸을 준비해 둔다.


이 부산스럽고 하찮은 몸짓은 어쩌면 아주 헛된 것이야.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단 며칠의 동작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테지. 혹여나 아침에 잠을 깨어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단잠을 잤어도 몹시 쓸쓸할 거야. 내내 외롭고 괴로울 거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거리로 나서기는, 정말이지 싫을 거야.


그럼에도 그대들이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어. 그 마음으로 나도 영원히 살고 싶어. 우리가 잠드는 세월이 영원히 같았으면 좋겠어. 종말이 우리가 영원히 모를 곳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때까지 영원히 잠들어 있을 수 있으면 좋겠어. 수많은 날을 자고 깨고, 그 지겨운 반복이 자세를 바꾸어가며 하는 영원한 포옹이라면 어떠할까.


영원히 사랑하겠다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나 영원히 모든 것을 알지 못할 정도만 무지할 예정이다. 그래서 영원히 깜박 졸고, 영원히 한숨 쉬고, 영원히 위로해. 영원히 살아서, 영원히 사랑 타령을 하게 되겠지. 영원이 걸릴 테니 기다리지 않기로 하자. 기대하지 않기로 하자. 그냥 다만 영원하기로 해.

그럼 이만, 줄일게.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