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믿겠지 좋아했다는 그런 말,

첫사랑에게 보내는 장

by 이닻

소설의 도입부를 구상하듯 쓴다. 너는 어디쯤에서 나와 맞물린 기억일까. 그럴듯한 키워드를 나열해 보지만 너는 명백히 클리셰 바깥에 있다. 봄. 벚꽃. 설렘. 첫인상. 기대감. 우연. 연속. 어느 순간. 그런 단어들과는 아주 먼 지점에.


시커멓다. 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봄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시커먼 사람이다. 실제로도 피부가 가무잡잡했고, 눈썹도 아주 짙었으며, 늘 흙먼지를 묻히고 다녔다. 대부분의 시간을 운동장에 버려두고 오는 탓인지, 교실에서는 뱉는 말마다 기침이 날 만큼 매서웠지. 시큼털털한 땀냄새. 걸리적거리는 것이라면 그게 의자든 사람 다리든, 걷어차고 보는 모양새. 머리색이 묘하게 밝았다. 달리 염색을 한 것도 아닌데, 어쩜 뿌리부터 반항적이었다.


아, 클리셰라면 이 대목에 있다. 그런 네가 여름방학을 앞두고 돌연 전학 온 내 옆자리에 앉았다는 점이다. 먼저 앉아있던 남자애 다리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차고서. 책상 위에 거칠게 걸친 팔, 죽 찢어진 눈, 땀에 절어 질척이는 목소리, 넌 누구냐는 사나운 첫마디. 전학 왔대. 누군가 대신 대답했지만, 딱히 네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첫날부터 무리도, 소문도 있는 남자애의 관심 따위.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지. 네가 교내 싸움 일등이든, 축구 일등이든, 알고 싶지 않았지. 체력장만 했다 하면 일등 하는 것도 알 필요 없었지. 하지만 그다음 순위가 나인 바람에, 너와 가까워지고 말았다. 순전히 사고였다. 그런 식으로 이목을 끌 생각은 꿈에도 한 적 없었으니까. 입 한 번 안 뗐는데 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악력이 50이 떴다느니, 말도 안 되는 루머가 눈앞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어지러운 시야 끝-팔짱을 낀 채 나를 빤히 건너다보는 네가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니. 아마도 조금은, 재밌어했던 것 같다. 50이었던 수치가 항간에 떠돌기로는 조금씩 더 높아져, 나중에는 180까지 갔다. 팔씨름을 하자는 아이들이 자꾸만 반으로 찾아왔다. 어안이 벙벙하게도, 족족 이겼다. 웅성대는 구경꾼들 중 너는 가장 신나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어쩐지 부끄러웠다. 언젠가는 네가 내 앞에 팔을 들이밀고 앉을까, 걱정이었다.


180이 별명으로 자리 잡은 후에는, 너도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교실이든 급식실이든, 불쑥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와서 묻는 말도 하나씩 더 늘어났다. 수프에 밥 말아먹어 본 적 있느냐고 묻는가 하면, 무슨 우유를 좋아하냐고 묻기도 했고,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물었다가, 휴대폰은 언제부터 썼는지, 전학 오기 전에는 뭐 하고 놀았는지, 범위도 맥락도 없는 질문들을 던져대었다. 나는 대답을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네가 언제 또 찾아올지, 또 무어라 말을 걸지, 이렇게 저렇게 대답하면, 네가 어떻게 반응할까-그런 것들을.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내다보기 시작한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의자에 엉덩이 딱 붙이고 앉아서 글이나 쓰는 일이 훨씬 더 재밌었지. 무료해서가 아니었어. 너는 축구 경기 한 번에 기분이 오락가락, 태양까지 솟구쳤다 지구 중심부까지 추락하곤 했으니까. 네 기분을 상대하려면 오늘 경기가 어떤 흐름으로 가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해 두는 게 좋잖아. 눈에 잘도 띄는 빨간색 유니폼. 햇살을 받으면 한층 더 밝은 갈색으로 반짝이고, 번들거리는 머리카락. 흥분해서 마구 뭉개지는 말소리, 고함지르는, 갈라지고 튿어지는 소리......

❝ 야, 비켜. 비키라고!


교실까지 끌고 들어온다. 경기에서 진 날이었다. 너는 교실 문을 막고 서있던 남자애 하나를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분이 덜 풀렸는지 이미 넘어진 애를 멱살까지 잡았다. 다행히 때리지는 않았다. 허공에 욕을 뿌리며, 느릿하게 돌아선다. 제 자리를 내버려 두고 이리로 온다. 내 옆으로. 의자를 뒤로 길게 빼고 앉는다. 고개를 외틀어, 나를 아주 빤히, 퍽 의도적인 시선으로, 본다.


❝ 와, 오늘 힘들다.


웃는다. 땡볕에 시커멓게 그을린 그 애가, 순식간에 만개하는 봄꽃처럼 환하게 웃는다. 나를 향해, 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그 눈동자에 비추어 볼 수도 없을 만큼 눈을 휘어가며.


있잖아, 첫사랑 별 것도 아니더만. 그 순간 진짜 사이코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지레 두려움에 심장이 막 뛰었는데 말이야. 그 웃음이 온전히 내 것 같아서, 이상하게 고백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냥 따라 웃어버렸지. 성격 파탄자냐고, 대꾸하자 네가 엎드려 킬킬거렸다. 흔들리는 뒤통수에 이번에는 대답 말고 질문을 들이붓고 싶었다. 좋냐. 좋냐고.


어쩌면 그때 저지르지 못한 탓이다. 네가 아주 멀리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무렵. 축구를 제대로 배우러 간다고 했다. 어차피 네 질문 거리도, 내가 내어놓을 대답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말수가 적어졌다. 대신 교실을 박차고 나와 운동장 끄트머리에 앉아서 네 경기를 보았다. 가까이. 최대한 가까이. 공이 내쪽으로 굴러올 때마다, 네가 쫓아 달려오는 모습을 눈 부릅뜨고 보았다. 차라리 한 대 잘못 얻어맞고 싶었거든. 공에든, 발에든. 내 꼴이 답답했던 친구의 입에서 기어코 그 말은 나왔다. 야, 얘가 너 좋아한대.


코앞에서 들어놓고, 공만 챙겨 바삐 돌아가던 너의 뒤통수. 욕도 웃음도 얻지 못한 채 볼품없이 사라지던, 나의 마음. 그게 다 뭐였지. 혼자 숨겨두고 있는 것만으로 사랑스럽던 말이, 충동에 힘입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징그러워지는 게.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 실체가 없어지는 게.


아무런 힘도 없는 말, 끝내 내 입으로 정정하지도 못한 말, 한때의 기억에 옅은 획이라도 슥 긋지 못한 그 말, 말, 말. 늦었어, 아니면 일렀어. 묻지 못한 마음을 허옇게 묻혀 그린 트랙은 너무 넓어서, 좋은 운동장은 될 수 없었다. 너는 어련히 알아서 떠났다. 내가 맴돌던 자리와는 무관한 일이야, 알지. 너는 공을 쫓아오고 있었고, 나는 다만 거기 앉아 있었을 뿐이다. 네가 가버리고 나서도 점심시간이 얼마간 반복되었을 뿐이다.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만약'이 심장에 걸려 한동안은 기침이 심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안 믿겠지, 좋아했다는 그런 말.


그럼 이만, 줄일게.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