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흐르는 책방.
한참 취업준비에 바쁜 동창을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만났다. 이름정도 알고, 길에서 마주치면 인사정도 하는 사이였다. 따로 연락을 할 만큼 친하지는 않은...
문을 열고 들어온 동창은 궁금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여기서 일해?”
“응, 책 좋아해서 알바 한번 해보려고....”
“너, 재미있게 산다. ”
(미소를 짓는다.)
"너는 어때?" " 응, 그렇지뭐. 힘드네. "
(친구는 피곤해 보였지만, 나는 열중하는 모습이 부럽다는 생각을 속으로 한다)
친구는 책을 몇 권 들여다보고는 집으로 향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무엇일까? 안정성, 비전, 급여, 4대 보험, 성과급, 출퇴근거리, 근무여건, 복지제도 등 다양한 직업 선택기준을 제외하고 그냥 내가 가장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일은?
나는 책, 커피, 음악 세 글자로 귀결된다. 여기에 가끔 여행이 가미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분위기 좋은 테이블과 의자에서 커피를 한잔 놓고 책을 보는 그런 일. 그런 직종이 있을까? 아마도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부담 없이 임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나중에 은퇴를 하게 된다면 그런 공간을 갖고 싶다.
대학시절,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적이 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지방광역시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대학 3학년쯤? 대략 그쯤이다. 나는 101동에 살았다. 우리 동입구에는 경비실이 있고 그 왼편에는 슈퍼가 있었다. 그 옆이 정육점. 좀 더 가면 세탁소. 건너편 어귀에는 비디오가게와 책방이 있었다. 비디오가게, 책방은 나란히 있었다. 당시에는 금요일이나 토요일쯤, 한가한 시간대에 들르기 딱 좋은 곳이었다. 각 집마다 비디오기계가 늘 있었고 최신영화는 1,500원. 비교적 요즘 영화는 1,000원. 옛날 비디오는 500원에 빌렸다. 그 가격의 기준은 1993년경~1999년 언저리의 시기이다. 대여기간은 2박 3일 정도였던 기억이다. 시험이 끝나거나 주말에 심심하면 비디오가게에 가서 한참을 골라서 영화를 보는 것은 정말 꿀재미였다.
그 옆에는 책방. 오랜동안 책방에는 아저씨가 사장님이었는데,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책방에 들렀더니 젊은 언니 사장님이었다. 같은 20대로 보여서 들르면서 한 번씩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언니가 성격이 좋았던 것 같다. 서글서글하고 예뻤던 사장언니.
보통 금요일밤이나 토요일 오후 정도에 한 번씩 책방에 들렀다. 만화책은 한 권에 300원, 소설책 등은 700원 정도에 빌렸다.
어느 날, 언니에게
“언니, 책방에서 일하는 것 좋겠어요.”
“어떻게 책방을 하게 되었어요?” 와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언니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강사로 몇 년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그만두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뉴질랜드로 여행을 갔다고 했던가, 워킹 홀리데이를 갔다고 했던가 기억이 가물하지만, 아무튼 거기를 가서 번지점프를 하고 왔다고 했다.
당시에 언니의 경험이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아직 기억이 나는 걸 보니.
나는 겁이 많아서 번지점프라는 것은 인생에서 상상도 할 수 없어서였을까?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언니는 자기 일을 해보고 싶어서 책방을 인수해서 운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작은 책대여점이 크게 성공할 이유가 없고 금방 답답했을 것이다. 언니가 큰 돈벌이는 안되고 꾸준히 하면, 그냥 여자월급정도는 나온다고 했다.
그즈음에는 군무원공부를 생각 중이라고 했다. 많이 어렵지 않을 거라고. IMF를 겪고 지방 국립대 수많은 지인들이 공무원공부를 하고 있었다. 2년, 3년. 기약 없지만 다들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고 간간히 합격소식이 들려왔다.
언니의 가까운 지인이 합격하였고 학원을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공부할 생각이라고 했다. 내가 책방... 같은 곳에서 일하면 정말 멋지겠다고 이야기하자 언니는 갸우뚱하면서
“그래? 그럼 나 학원에 가는 시간에 알바를 한번 해볼래?”
하고 제의를 해주었다.
페이를 의논하게 되었다. 그 시절 뭐가 그리 조심스러웠는지 깊게 생각했다.
나는 늘상 매사에 쓸데없이 생각이 많았고, 정작 내 의견표현은 잘 못했다.
상대방의 의견을 먼저 묻고, 나의 판단은 그 다음이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착하다고 했지만, 실상은 의견주장을 못하는 소심쟁이이자, 미움받고 싶지 않은 내 감정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었다.
언니가 제시한 금액은 평일은 시간당 1,000원 주말은 시간당 1,500원 정도를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책방이 수입이 적었기에 그러했던 것 같다. 내가 대학 1학년때 학교 근처 CNA대형문구에서 알바를 할 때 시간당 1,400원에 일했다. 이 시기는 몇 년후라서 1,000원의 금액은 적은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책방알바를 해보기로 했다.
일단 우리 집 코앞이라서 교통비가 안 들었다. 매우 매우 가까운 알바자리였다. 일도 힘들 것이 없었다. 정말 작은 책방이었고 간단한 정리정돈, 청소, 손님이 왔을 때 바코드를 찍어서 대여, 반납처리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손님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밤 9시 30분이 넘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어느 가게나 그렇지만 손님들이 몰리는 시간대는 정해져 있고, 없을 때는 참 정적이 흐른다.
그냥 출근해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가끔 손님이 오시면 기다렸다가 결제해 주고, 꿀알바였다.
근무시간은 평일은 저녁에 5시간 정도, 주말은 시간이 더 길었다.
출근을 하면, 언니가 바삐 학원가방을 들고나갔다. 주말에는 테이블 위에 언니가 먹고 남겨준 양념치킨이 반이상 남아있었다. 은색 호일로 전체가 감싸져 있었는데 열어보면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치킨을 먹으면서 컴퓨터를 바라본다.
컴퓨터는 아주 오래된 버전, 인터넷은 되지 않고 도서 대출, 반납만 되는 것이었다. 윈도가 아닌 도스컴퓨터라고 불렀나? 삐삐~ 거리는 파란색 바탕의 시스템이었다.
책방카운터에는 라디오가 놓여있었다. 늘 테이프는 한 개가 들어있었는데 디즈니 뮬란의 OST가 들어있던 테이프이었다. 한참을 영어로 들리는 테이프를 몇 차례 돌려서 틀고 나면 퇴근시간이 되었다. 간단히 정리를 하고 유리문을 잠그고 나온다.
책방의 책중에 기억나는 것은 꽃보다 남자라는 만화책이다. 손에 닿는 위치에 배치되어 자주 보였던 만화
시리즈물이었는데 내가 중~고등학교때 인기있었던 소녀들의 만화책이었다. 한권 한권이 나올때마다 애타게 기다리던 친구들이 있었다. 만화로는 입소문이 꽤 있던 작품이었는데 내가 알바를 했던 시기부터 대략 10년후에 국내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소설책중에서는 <잃어버린 너>가 기억이 난다. 90년을 전후하여 유명했던 화제의 소설이었다. 김혜수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감동 그 자체였다. 엄마도 이 책 읽고 싶다고 하셔서 빌려다 드렸던 기억이 난다.
몇 달간의 알바자리는 얼마 후 언니가 책방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되고, 나도 졸업반이 되고 공부시간을 더 확보해야 해서 그만하게 되었다. 그 후 새로 운영을 맡은 분도 젊은 분이었는데 마땅히 직장이 없었던 것 같고 부모님이 책방에라도 앉아있으라고 가게를 얻어주었다고 들었다. 집 근처 책방이라서 한 번씩 책 빌리러 가면, 새로운 사장님은 그냥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신간들을 들이고 관리를 해야 하는데 새로운 만화, 책이 들어오질 않았다. 자연스럽게 손님은 끊기게 되고 일 년도 되지 않아서 폐업을 했다.
그 이후 비디오가게옆 책방은 항상 문이 잠겨있었다. 안에 있던 많은 만화책들은 중고로 어디로 넘겨지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그 후 나도 대학원진학으로 청주로 떠나오게 되었고, 가끔씩 집에 가는지라 더 이상 비디오가게, 책방에 갈 일이 없어졌고 더 이상 비디오를 보는 사람도 몇 년 사이 자연스럽게 없어져서 그동안 잊고 있었다.
사장언니와는 연락이 끊어져서 그 후로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한다. 언니는 군무원에 합격했을까?
나는 사장언니의 책방도전에 숟가락을 올려서 하고 싶은 일을 해본 듯하다. 작더라도 자기 사업을 해볼 결심 혹은 서점이나 도서관에 취업해 볼 경험은 해보지 못했지만 언니의 작은 가게에서 알바를 해보았다.
깊은 밤, 작은 골목의 책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도 보고.... 골목사람들 소리도 듣는 그곳이 좋았다.
책방아르바이트의 경험..... 나도 그런 시간이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