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_1

마흔 길 골목골목__ 열 번째

by 옹쓰복쓰

[대문사진설명_2017.05.01 ‘선릉과정릉’ 뒤편 지하 카페: 화살표 따라 자연스럽게 내려가고 있는 나를 발견]








미술관이나 갤러리들을 다녀오면, 작가들이 각자의 삶에 임하는 자세를 자연스럽게 느끼며 배우고픈 마음이 들기도 하고 나 자신을 좀 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토닥임을, 때로는 북돋움을 가감 없이 받아 온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내게 닿는 수많은 작가의 혼이 깃든 곳이어서일까, 항상 그러한 힘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내 두 발아래 다가와 있다. 부담감 없이 편히도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것들을 날름 주워 먹고자, 예술공간을 찾아다닌다. 홀린 듯이 자연스레 가고 있다.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의 발 앞에 닿을 수 있는 홀씨가 되기를 꿈꾸며.












마흔 길 골목골목__열 번째

"문래동, 그 길은"





[2015.11.28 문래동 어느 공구상사 앞: 나도 저 스패너로 우리 집 나사 조여 봤다!]































“오늘의 첫차는 05:37입니다.”

지하철 전광판에 뜬 문구를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두었었다. 올해 초, 그 사진을 꺼내 들자 육 년 전, 하품 몇 번에 두 눈이 벌게진 채로 그곳에 서 있던 삼십 대 후반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나름 계획한 ‘나만의 미술관 여행’을 가기 위해, 집 근처 지하철역의 첫차를 탔었다. 여러모로 지쳐있던 터라, 지하철 거울에 비친 내 몰골은 터지기 직전의 타이어처럼 터덜터덜 부어 있었다. 그래도 “늴리리야 니나노”를 외친 걸 보면, 마음만은 제법 설레 있었던 것 같다.


















이십 대부터 내 취미이자 스트레스 해소법은, 홀로 미술관이나 갤러리 안에 있는 작품들을 보러 다니는 일이었다. 그때그때 당기는 주제를 정한 후, 연관된 두세 곳을 엮어 빈 A4용지 위에 나만의 지도를 색색별로 그려놓고 그 계획대로 움직이곤 했다. 그 재미가 참 쏠쏠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재미는, 계획에 없던, 미술관이나 갤러리 근처 골목에 스며든 일상 속 작품들을 보고 즐기는 일에 있었다. 생활 터전 곳곳에 내 웃음을 자아내는 예술적인 요소들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해내고 사진에 담는 일이 즐거웠다. 그 사진들은 언제든 나를 다시 그때의 기억으로 데려다주었다. 한 번 더 곱게 체에 걸러낸 진짜 기억 속으로 말이다. 그 기억들에는 항상 뜻밖의 걸음, 뜻밖의 만남이 있었다. 그날 역시 기대를 한껏 품고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떠났고, 목적지는 문래동 3가였다.







배가 너무 고파, 서울역 승강장 출구에 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국밥집으로 달려가 정신없이 뜨끈한 국물을 들이켰다. 기차 안에서 먹은 달걀 하나는 식도를 내려가다 사라져버렸는지 존재감이 없었다. 배가 그득하니 차오른 후에야, 지도를 만지작거리며 시청역에서 환승한 후 문래역에 내렸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문래동 철공소 거리 입구에 섰다. 그곳에는 ‘철공예술간판 프로젝트’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철공 일을 해오던 분들의 풍경에, 예술가들이 그 특징을 잘 살리는 창작 간판들을 더해가는 프로젝트인 듯했다. 그래서 프로젝트 지도에 적힌 칠십여 곳이 퍼져 있는 골목골목을 다 가보고픈 욕심에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선지, 주말의 초입이라선지, 골목은 조용했다. 입구에 있는 가게 몇 집만 문을 열고 다양한 모양의 철재를 차에 싣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때마침 트럭 위로 올린 긴 철재 부딪치는 소리에 내 인사는 파묻히고 말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그 앞을 서둘러 지나갔다.







용접의 흔적들로 숨 쉬는 골목골목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동화 속 ‘제페토’ 아저씨 - 골목에서 나무로 못 박은 ‘제페토’라는 간판을 봤다 - 가 피노키오를 만들었던 것처럼, 이곳의 수많은 ‘제페토’들이 만들어 놓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폭발하는 간판들이 보였다. 눈금이 그려져 있는 ‘자(ruler)’ 모양의 작은 철공소, 두꺼운 행주로 손잡이를 잡아야 될 것만 같은 큰 솥이 붙은 음식점, 압정에 글자를 박아놓은 것처럼 간판을 달아놓은 금속 집, 내 키만 한 거대 스패너를 간판으로 사용한 공구상사까지, 참으로 독특했다. 그리고 주위에 그려진 크고 작은 벽화들이 그곳 간판들을 더욱 재미있게 느끼도록 해주었다. 가스통과 에어컨 실외기마저 벽화 작품의 필수요소처럼 자연스럽게 자리한 모습이 좋았다. 긴 골목에 덜렁 혼자 서 있어서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던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15.11.28 제페토 가게 : 각목을 맞대고 못질을 해놓은 제페토 글씨를 올려다보며]














얼마나 걸었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가게 안팎에 놓인 다양한 모양의 철들과 그것을 다루는 기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직접 작업하시는 분들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다음으로 미룬 채, 그들의 손길이 닿았던 철 내음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색색별로 가지런히 꽂혀 있는 길다란 쇠들이 얼마나 멋스럽던지, 녹슨 철문과 원통 나무가 얼마나 멋있게 어우러졌던지. 이곳은 마치 문래동의 철 골목들을 지금까지 지켜온 이들이 만들어낸, 일상 속 작품들이 놓인 길거리 갤러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뜨겁게 살아내는 이들이 뿜어낸 창의적인 무언가를 발견할 때면, 나 역시 살아 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가슴 한 켠 묵지끈한 감정이 한결 털어내진다. 마흔 근처를 살 때부터, 젊음과 나이 듦 그 사이 어디에 서서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만 두리번거리는 기분이 간혹 들었다. 무진장 젊은 나이일 수도 있지만, 마냥 해맑게 젊지는 않은 나이일 수도 있기에, 그런 생각이 나를 더 옭아매는 것 같았다. 그랬던 나였기에, 이곳 골목의 주인공이 살아내는 뜨거운 삶 속의 작품들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벅찬 마음 숨 고르며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높다란 아파트가 사방으로 보였다. 순간,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내 감정이 현실로 확 돌아왔다. 분명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이 수십 년에 걸쳐 많이도 바뀌었을 거라 생각되었다. 오랜 시간 이곳에서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이들과 그곳에 예술로 색을 더해가는 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골목이기에, 문래동 3가 철물 골목이 이처럼 뭉클하게 지켜지고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리고 그 덕분에 누군가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는 고백의 말을 중얼댔다. 한 번쯤은 튀기는 불꽃을 머금고 태어났을 골목골목의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녹아내려, 자연스레 내 삶에, 내 글에 담겨지기를 바랐다.

그날 문래동에서의 그 자연스러운 변화는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아무것도 나를 얽매지 않았어도, 이러쿵저러쿵한 이유들로 나 스스로 주저 앉혔던 진짜 ‘나’가 힘차게 일어나 당당히 버텨내려고 집중 중이기에, 그 변화는 “찐이다!” 싶다.







문래동, 그 길은 부드러운 사포 같았다. 손이 스쳐도 전혀 베이지 않는 사포, 그러나 나무결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사포처럼, 거칠고 투박하지만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제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나도 그리 살아보고 싶다. 아니, 그리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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