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하지만 따뜻했다⋯.”_1

마흔 길 골목골목__ 여섯 번째

by 옹쓰복쓰

[대문사진설명_ 2018.11.13 카페 앞 흰 분필자루 COFFEE 글자: 나의 ‘일상으로의 초대’]





‘coffee’라는 글자 모양이 좋았다. ‘f’와 ‘e’가 짝지어 함께하는 - ‘co’(‘함께’라는 의미를 지닌 접두사) - 그 모양이 정겨웠다. 그래서 혼자 컴퓨터 속 사전을 열어두고 ‘f’와 ‘e’로 시작하는 단어를 찾아보았다. ‘friend’와 ‘expectation’이 가장 내 마음을 잘 담은 것이었다. ‘friend’는 친구 외에도 후원자, 지지자, 우리 편이라는 뜻을 품고 있었고, ‘expectation’의 사전적 의미는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라는 뜻이었다. 내게 ‘coffee’란, 소중한 벗과 커피를 함께 마시며 혼자가 아닌 우리가 되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설렘 가득한 기대감을 선물 받는 것이다. 카페 조명등이 잔 속에 달처럼 떠오르는 커피 한 잔에 담긴, 나의 선물 같던 일상 속 골목을 거닐고자 한다.













마흔 길 골목골목__여섯 번째

“커피가 내겐 쓰다.”




[2020.01.11 가정집 개조한 중구 어느 카페: 커피를 흘려도 어울렸던 찻잔 테두리]




















나는 쓴맛이 좋다. 말 그대로 써서 좋다. 단맛이나 신맛보다 쓴맛이 느껴지는 음식들을 더 즐겨 먹는 편이다. 그래서 늘 약재를 달여 놓은 탕이 입에 착 붙고, 끝 맛이 쌉싸름하게 치고 올라오는 나물 반찬으로 젓가락이 갔다. 이런 쓴맛 사랑은 태생부터 그랬던 듯하다. 단맛과 신맛을 즐겨 드시던 나의 모친은 나를 뱃속에 품은 열 달 내내 그 맛들이 당기지 않고 그렇게 쓴맛이 먹고 싶으셨단다. 떡잎부터 쓴맛을 알아본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서인지, 쓴맛에 대해서는 참 관대한 편인 것 같다. 온전히 쓴맛만을 내는 음식도 맛있지만, 다른 맛 뒤에 은은하게 올라오는 쓴맛처럼 ‘쓰다’는 존재만 드러나도 그 음식을 즐겨 먹었기 때문이다. 담백한 청국장만 넣고 보글보글 끓인 찌개에 담긴 쓴맛도 좋았고, 식사 후 들이키는 믹스커피의 밀려오는 입안 가득 쩝쩝한 쓴맛도 좋았다. 그리고 씹을수록 저 밑에서 우러나는 조리되지 않은 연근의 쓴맛도 참 즐긴다. 나를 잘 아는 누군가가 다가와 “너는 뭐든지 잘 먹잖아.”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분명 나만이 훨씬 더 즐겨 먹고 잘 먹는 맛이 있기에, 온전히 그 말에 수긍하기가 힘들 것이다. 쓴맛을 향한 내 마음은 제법 진심인 듯하다.
















20년 전 스물의 나는, 쓴맛이 부드럽게 밴 묽은 아메리카노가 나오는 레스토랑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 당시에는 원두커피를 지금처럼 그리 손쉽게 즐겨 먹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인지, 식사 전 서비스로 나온 그 ‘커피 물’은 내게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거기다가 기분 좋은 향까지 더해진 그 커피는 어른스럽게 느껴져,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쓴맛 그 자체를 기억하고 좋아하던 내게, 그 장소에서 건네는 아늑함과 묘한 진취 감이 더해진 쓴맛이 설렘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렇게 그 커피는 내 삶의 앞부분을 매듭짓고 새로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좋아하게 되면 이것저것 궁금한 게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나 역시, 그곳 커피와의 만남 이후 원두커피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났고, 처음에는 친구들과 줄곧 가게마다 다른 원두커피 맛과 향을 즐기러 다녔다. 행복한 쓴맛을 공유하는 시간들이었다. 커피가 써서 좋았던 나는, 결국 그 쓴맛에 멋이 더해진 원두커피와 친해지고 싶었고, 그래서 배우러 갔다. 바리스타 2급 자격증반이 열리는 커피 향 나는 학원으로 신나게 갔다.

그런데 참 멀기도 먼 곳이었다. 그 학원은 집에서 1시간 40분 정도 버스를 탄 후, 8차선 위 육교를 건너 10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곳이었다. 나의 평소 일상 패턴으로 보면 제법 긴 시간 버스를 타는 일이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배우러 갔다.






실습수업이 진행되던 첫날, 요즈음처럼 버스 도착 시간이 실시간으로 뜨지 않았기에 일찍 정류장으로 향했다. 흔들리는 버스 맨 뒷좌석 왼쪽 창가 자리에 앉아 내릴 때까지, 한 편의 일상 다큐멘터리를 두 눈 가득 찍기 바빴다. 이른 낮이라 타고 내리는 이들이 많지 않았지만, 천 보따리부터 버스 계단 위로 올려놓고 허리춤 주머니를 더듬어 동전을 찾아 넣던 할머니의 등을 시작으로 코끝을 찌르는 파마약 냄새 한가득 품고 내 앞자리에 앉은 아가씨의 뒤통수, 이 버스가 어디메 시장에 가냐고 큰 소리로 재차 묻는 아저씨의 음성, 그리고 버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나는 “취! 취!” 바람 빠지는 소리까지, 정신없이 담아냈다. ‘나도 누군가의 일상 속 한 장면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 서로의 일상에 스며드는 듯한 친근함이 괜스레 생겼다. 생판 모르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아주 가끔은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버스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1시간이 넘어서면서부터는,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칠까 싶어 사람들로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어 다리도 저릿했지만, 다행히 제대로 목적지에 내렸다. 학원으로 가던 길은 어렴풋하다. 하지만, 강하게 뇌리에 남는 것은, 학원 건물 입구 근처에서 맡은 커피 향이었다. 미리 준비해간 지도를 다시 펴볼 필요도 없이, 그곳이었다. 그 향에 홀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커피 학원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너덧 명씩 마주 보고 앉는 교실 안 책상에는 이미 도착한 커피 수업 수강생들도 가득 차 있었다. 은은한 커피 향 때문인지, 반겨주는 이들의 미소가 따뜻해서인지, 원래 안면이 있었던 사이처럼 인사를 나누며 빈자리로 이끌어주는 그들의 손길을 따랐다.
















선생님이 내려주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수업은 시작되었다. 그 수업은 조금 더 많은 이들이 커피를 좋아하게 되고 제대로 맛있게 공유하는 문화로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만든 자격증반 같았다. 그래서 학교에서와는 달리,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을 만나는 떨림도 있었고, 그들과 함께 커피라는 관심사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주는 설렘도 있었다.

수많은 커피 이야기들을 들었던 매시간, 양손으로 거머쥔 따뜻한 머그잔 속 커피의 쓴맛이 참 좋았다. 커피 한 잔에는 커피콩을 수확하는 이들의 엄청난 노고가 스며 있음을 알고 난 후 마신 커피의 맛은, 그 전과는 또 다른 쓴맛이었다. 지금도 그들의 숨은 눈물이 내게 건네는 그 쓴맛을, 내가 좋아하던 쓴맛에 더해 기억하려 한다. 종강 후 치른 필기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며 자랑하기가 무섭게 곧 떨어져 버린, 실기시험에서 맛본 쓴맛도 함께 기억한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우리 반 수강생 중에서 유일하게 떨어진 나였다. 하하하.







실기시험은 배운 대로 차분히 해내면 붙을 수 있는 과정이다. 그런데 나는 조밀한 우유 거품을 만들라는 가르침을 뒤로하고 물풍선 불듯 공기 방울이 터져 나오는 거대 거품을 만들었고, 시원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저벅저벅 다시 실기시험을 치러 갔다. 무엇이든 시작하면 무조건 끝을 봐야 하는 스타일이라기엔 빈 구멍이 많지만, 배움에서는 꼬박꼬박 참여하고 매번 끝을 봤었던 나였기에 별 이변 없이 재시험을 치렀다. 혼자서.

실기시험에 떨어져 다시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에, 감독관들의 관심이 몰렸다. “이 자격증 따서 카페에서 일하려 해요? 아니면 창업 준비하세요?”라는 그들의 질문에 커피가 좋아서 한다는 말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소 뒷걸음치다 똥 밟듯이, 내 생각을 훨씬 더 멋있게 받아들이신 듯했다. 너무 감동이라며 기특해하는 그분들 앞에서, ‘다시 이곳에 오는 일은 없어야 해.’라는 생각만 떠오르며, 민망한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축하합니다!”

정말 다행이다. 비록 연습 때처럼 잘 해내지는 못했어도, 커피를 향한 나의 갸륵한(?) 마음을 보너스 점수로 더해 붙여준 듯했다. 그날 시험장에서 그라인더로 갈았던 커피 가루의 향에서 맡았던 묵직하고도 신선한 향내를 가슴에 안고서 기쁘게 그곳을 나왔다.







언젠가, 원두커피 중 제일 맛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어느 수강생의 질문에 신선한 커피콩을 갓 볶은 후, 그때그때 갈아서 내려 먹는 커피가 제일로 맛있다던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 인생도 그렇게 내려진 커피 내음처럼 살면 좋겠다 싶어, 내가 만들게 될 그림책에 자연스레 배인 나만의 좋은 향이 다른 이의 마음에 살포시 스며들기를 수줍게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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