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유기농 재료를 사러 다니는 아이쿱 자연드림 협동조합에서 ‘농부 시인이 들려주는 생명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대중 강좌를 열었다. 나도 주말 텃밭을 하다 보니 농사를 지으시는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궁금했고 시를 짓는 ‘농부시인’이라니 어떤 분일까 기대가 되었다.
장마가 시작된 초여름, 아침부터 빗줄기가 오락가락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로 향했다. 맨 앞줄에 자리를 잡고 시인을 기다렸다. 잠시 후 회색빛 생활한복을 입은 남자분이 들어오셨다. 하얗게 샌 머릿결과 뿔테안경이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고개를 숙이며 웃는 얼굴이 어린아이같이 해맑아 보이기도 했다.
서정홍 시인은 2005년부터 경남 합천 나무실 마을에 자리를 잡고 ‘열매지기 공동체’와 ‘담쟁이 인문학교’를 열었다. 마을이 공동체이고 학교가 되는 곳을 만들고 있다니 그 마을에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그곳에서는 자연에서 받은 것을 최대한 오염시키지 않고 그대로 돌려준다고 하셨다. 똥과 오줌을 거름으로 사용하여 농사를 짓는데 누구나 마을에 방문하여 귀한 걸 나눠주는 걸 언제든지 환영한단다. 강연장은 이내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는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참되게 바뀐다고 가르쳐 주신 이오덕 선생님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동네 사시는 배골띠기 할머니가 요양원에서 뛰쳐나와 택시로 집에 온 이야기며 아들이 시각장애를 가진 아가씨와 혼인하고 손자 ‘서로’를 낳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혼자 살다 가도 평생 살던 집에서 가고 싶다며 아흔 살 할머니가 한 번도 타본 적 없는 택시를 십오만 원이나 주고 집으로 돌아온 건 자신이 살아 온 삶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지 않느냐 했다. 아들의 아내가 될 아가씨를 딸이라 여기고 ‘앞이 안보이는 딸이 건강한 사내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니 얼마나 잘 된 일인가’ 하는 생각을 마음에 담았다고 했다. 며느리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에 걱정이 깊어가는 아내에게 막내아들이 ‘어머니는 눈으로 키웠습니까? 가슴으로 키웠습니까?’ 물으며 ‘어머니가 제일 잘 하는 게 자식 믿어주는 거 아닙니까?’ 하니 아내가 정신이 들었는지 ‘에미가 자식 못 믿었으면 지금까지 어찌 살아왔겠나.’ 하며 기운을 내더라는 이야기까지. 들려주는 사연마다 가슴이 울렸다. 시를 한 편 낭독해달라는 부탁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작은 다짐>이라는 시었다.
손자 ‘서로’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사흘 동안 농사일, 쉬기로 했다
산밭에 괭이질을 하다
지렁이 한 마리라도 찍으면 마음이 짠하니까
삼주 동안 좋아하던 술도 끊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하면 안 되니까
석 달 동안 채식을 하기로 했다
손자 서로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 더 맑아질 테니까
시를 읽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소중한 것을 대하는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마음을 울렸다. 하던 일도 멈추고 좋아하던 술도 끊고 마음을 모아 손자가 살아갈 세상이 맑아지길 기도하는 시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강연이 끝나갈 즈음 시집 한 권을 소개해 주었다. 강연에서 나눈 이야기가 담긴 ≪그대로 둔다≫라는 시집이었다. 짧은 만남이 아쉬워 나오는 길에 그 시집을 구입했다. 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졌지만, 이야기를 한가득 담아오니 마음이 든든했다.
책을 펼쳐 첫 번째 시를 읽었다. <더없는 시간>이라는 시었다.
책을 읽다가 자주 덮는다
무얼 깨달았나 싶어서
길을 걷다가 자주 뒤돌아본다
걸어온 길이 그리워서
잠을 자다가 자주 깬다
살날이 얼마나 남았나 싶어서
시를 여러번 읽었다. 지금, 이 순간이 되살아나 더없는 시간이 되는 것 같았다. 내게도 더없는 시간이 있어 마음이 놓였다.
<길>, <아내는1>, <아내는2>, <고수>, <58년 개띠와 60년 쥐띠>까지 한편 한편 천천히 읽었다. 시가 아주 유쾌했다. 시가 맛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번에 다 읽지 않고 아껴 읽었다. 머리맡에 두고 가끔씩 읽었다. 그러다 <그대로 둔다>는 시를 만났다.
서둘러 먼 길 떠난
박영근 시인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한
문영규 시인
마지막 여행길에 나를 찾아온
박노정 시인
휴대전화 안에 들어 있는
전화번호
그대로 둔다
언젠가는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서로 떨어진 곳에 있으면
전화 걸어
막걸리 한잔 해야 하니까
주거니 받거니
밤을 새워야 하니까
먼저 보낸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전화번호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둔다는 시인의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졌다. 내게도 그런 마음이 있어 위로가 되었다.
시집 ≪그대로 둔다≫에 담긴 시는 우리를 시인의 마음이 되게 한다. 시인이 그런 것처럼 가족과 이웃을 있는 그대로 보며 유쾌하게 살고 싶게 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듯 우리 삶을 그렇게 봐줄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시간도 시처럼 빛나지 않을까. 농부의 마음이 시가 되어 내린다. 장맛비가 그치면 싱그러운 여름이 시작되겠지. 시를 읽는 마음에도 소나기가 지나고 여름이 온다. 더없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