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얼마만의 쫄깃함인가. 아마 8년 정도 전,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러 간 이후 처음이다. (물론 공인중개사 시험은 국가공인 시험이기에 스케일이 이것과는 달랐다.) 11명의 학생이 책상 위에 있는 책을 다 집어넣고 수험표와 신분증, 그리고 필기도구만을 남겨 놓고 정적이 흐른다.
선생님이 시험지를 한 장씩 나눠주자마자 학생들은 열심히 답안을 작성하기 바쁘다. 오늘의 시험은 총 4문제로 모두가 서술형이다.
"답을 쓰시다가 답안지가 부족하신 분은 말씀 주세요."
나는 잠깐 의아해했다. '이 A4 한 장으로 부족하다고?'라고 잠깐 멈칫한 것은 나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만 빼고 모든 학생들의 볼펜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50분이라는 시험시간 동안 모든 학생이 숨도 쉬지 않고 답을 적어 내려갔다. 어젯밤 꿈을 꾸면서까지 외웠던 답들. 한글자라도 빠트리지 않으려고 바쁘게 손이 움직였다. 어느새 나도 앞장을 다 채우고 뒷장으로 넘어가 답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 썼어요."
한 학생이 답안지를 제출했다. 나는 겨우 4문제 중 2문제만 적고 3번째 답안을 적고 있었는데, 벌써 다 쓴 학생이 나오다니? 나는 급한 마음에 시계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벌써 20분이 지나있었던 것이다. 학생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먼저 문제를 다 풀고 엎드려 자는 친구들. 그때부터 내 마음은 더욱 요동쳤던 것 같다. 나는 아픈 팔목을 부여잡고 부지런히 적어 내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열심히 며칠 동안 외운 답이 갑자기 생각이 안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달달달달 외웠던 답들인데!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심호흡을 하고 잠시 멈추고 찬찬히 기억해 내려 노력했다. 나이 마흔에 나도 이렇게 시험 때문에 긴장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시 답안을 적어 내려갔다. 결국 나도 A4용지의 앞뒤면을 가득 채운 후 시험지를 제출했다. 시간을 보니 딱 40분이 지나있었다. 며칠 전부터 아팠던 팔목이 더 아픈 것 같았다. 필기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낄 여유도 없이 바로 실기시험이 시작되었다.
실기시험은 각자 그림책을 하나 골라 수업 계획안을 미리 제출한 후 학생들 앞에서 시연을 하는 것이었다. 그림책을 아이들과 10년 넘게 읽으며, 그리고 '마음수영'이라는 그림책 하브루타 수업을 3년째 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수업 계획안을 써 본 적은 처음이었다. 부족한 나의 실력으로 수업대상, 목적, 방식 등을 적어 내려갔다. 나는 그림책 하브루타를 오래 해 왔기 때문에 하브루타 식으로 그림책 읽기 수업을 준비했다.
실기시험 순서는 계획안을 제출한 순서대로 라며 나의 이름을 제일 처음 호명했다. 아뿔싸! 이럴 때 나의 성격이 한탄스럽다. 좀 천천히 낼걸. 내가 1번으로 제출했을 줄이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앞에 나가서 인사를 했다. 작년부터 그림책 작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면서 수많은 좋은 그림책들을 만났는데, 그중에 제일 닮고 싶은 그림책인 '괴물들이 사는 나라(모리스 샌닥)'을 선택하여 시연을 했다. 약 10분간의 시간 동안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질문을 던져, 늘 하던 대로 질문으로 그림책을 읽었다.
첫 번째로 하니 다른 사람들보다 긴장을 더 했지만 끝난 후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른 학생분들의 시연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껏 다른 선생님들의 그림책을 읽어주는 광경을 본 적이 많지 않았는데, 이 자격증 시험의 실기시험이라는 시간을 통해 다른 선생님들의 그림책 읽기를 들어보니 도움이 많이 되었다. '아, 저렇게 읽어주면 재밌겠구나.' '아, 저런 방법도 있네!' 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모든 시험이 끝난 후 시험장을 나오며 몇몇 동기분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늘 줌으로만 보던 동기들과 서로 하는 일, 사는 이야기 등을 하니 내적 친밀감이 더 생겼다. 아쉬웠던 것은 내가 그 자리에서 나이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웃음) 다음 1급 시험 때 다시 만나자고, 그때까지 열심히 공부하자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아이들과 책육아를 하며 그림책이 좋아졌고 하브루타를 배우며 아이들과 그림책 하브루타를 시작했다. 그렇게 그림책과 사랑에 빠지면서 그림책을 내 손으로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책 작가라는 꿈을 꾸게 되었고 지금 그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느리지만 내딛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림책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그림책 관련 전문 공교육은 없다. 대학에 전공과목으로도 없다. 그러나 대학원 또는 사설 교육기관에서는 요즘 그림책 관련 수업이 엄청 많다. 그림책 심리, 그림책 코칭, 그림책 스토리텔링 등등. 처음에 고르는데 조금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름 업계분의 조언을 받아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림책 작업을 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물론 나의 작업이 이것 때문에 더 좋아진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론을 알고 모르는 것은 크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막연히 사랑했던 '그림책'이라는 존재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해부하며 관찰하게 되면서 더욱더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주일에 1번, 저녁 8시부터 2시간 동안 밀도 있는 수업을 총 20주를 들었다. 이제 2급 시험을 본 것이고 앞으로 3단계를 들으면 1급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처음 이 수업을 결재할 때만 해도 (금액이 비싸서) 한 번 들어보고 결정해야지,라는 마음이었는데 결국은 마지막까지는 나는 달릴 것 같다.
이 자격증이 나의 그림책 작업에 지대한 영향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나의 책이 나왔을 때 같이 시너지가 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 자격증이 사실 뭐 대단한 것이라서 나에게 큰 변화를 주진 않을 것이다. 워낙 이러한 자격증도 많고 활동하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이 길을 걷는 데 있어 이번에 자격증을 따면서 다시 한번 정리하고 복습하게 되었고 앞으로 더 이 길을 걸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비록 시험 점수가 낮더라도 오랜만에 쫄깃한 시험 경험도 했고 불특정 다수 앞에서 그림책 읽기 시연도 했고 다른 분들의 시연을 통해 배울 수 있었으니! 그걸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그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