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림책 출판 계약서 상의 마감일은 2023년 10월이었다. 즉, 그날까지 그림책의 모든 콘텐츠를 다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계약을 할 때만 해도 10월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왠지 그전에 책을 다 완성해서 출판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그런 야무진 꿈을 꾸었었다. 그런데 웬걸. 계약기간을 1달을 훌쩍 넘겨서야, 이제야 구성이 잡혔고 그 구성과 스토리대로 그림에만 전념하면 된다는 사실. 그럼 지금까지 뭐 했는지? 나도 궁금하긴 하다.
보통 그림책 작업을 좀 해본 사람들은 나의 작업을 보고 ‘3개월이면 끝나겠네~’라고 했을 것이다. 실제로 나의 그림책 스승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계약기간을 2023년 10월로 잡았는데, 괜찮은 건지 여쭈려고 전화했을 때, 정확히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도 정말 그 정도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는 그림책 작업을 좀 해본, 그리고 그것도 미대 전공자들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계약기간이 다가올수록 나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비즈니스를 해 본 사람이라면 계약, 그리고 계약서의 명시된 날짜나 금액과 같은 약속 사항이 얼마나 중요하고 효력이 강한지 알 것이다. 그래서 10월이 코 앞으로 다가올수록 나는 작업을 끝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그림책 출판 계약, 파기 당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 때문에 매일 밤잠을 설쳤다.
그 긴 긴 시간 동안 나는 중간에 한 몇 주는 그림을 아예 그리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림만 그리지 않았을 뿐, 머릿속에서는 늘 그림책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하면 이상한가?’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떨까?’ 끝없이 고민의 고민을 이어갔지만, 사실 쉽게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그리고 그 좋던 입맛마저 떨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주변 많은 사람들한테 내년 봄에는 그림책이 나온다고 이야기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꾸 가족들은 그림책 작업 언제 끝나냐고 하루가 멀다 하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러니 마치 시한부 인생인 마냥, 달력의 날짜를 하나하나 지워가며 작업은 하지 않고 한숨만 푹푹 쉬는 날이 허다했다.
그러나 또 그렇게 며칠을 그림조차 거들떠보지 않은 날을 보내고 나면 또 며칠은 그림 그리느라 여념이 없는 나날도 있었다. 육퇴를 하고 침대에 앉아 졸린 눈을 비비며 그림을 그리며 밤을 지새우진 못했지만, 그래도 늦게까지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겨우 그림을 몇 장 그리고 나면 나의 할 일을 다 한 것 같아 뿌듯했다. 그리고 그 작업물을 편집자님께 메일로 보낸 후, 수식확인까지 마치면 한 며칠은 또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의 작업물을 보내도 바로 편집자님으로부터 회신을 받지는 못한다. 편집팀에서 내부적으로 회의도 해야 하고 의견취합을 하는데 2,3주가 걸리기 때문이다. 그 후 또 편집팀과 내가 일정을 맞춰서 미팅을 하게 되면 보통, 내가 작품을 보낸 지 1달이 훌쩍 넘게 된다.
그렇게 몇 번은 왔다 갔다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10월이 온 것이었다. 나는 어느 날 편집자님께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계약기간을 넘겨 버리면 어떻게 되나요?
이 물음을 던지는데도 엄청난 고민을 했다. 그냥 모른척하고 슬쩍 넘겨버려? 괜히 물어봤다가 계약을 파기당하면 어쩌지…? 두근 거리는 마음을 안고 편집자님께 물어보니 웃으시면서 “작가님, 그런 것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저희는 작가님의 최고의 작품이 나오는 것이 좋지. 빨리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더 좋은 작품 만들면 돼요!”라고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마음이 놓였었는지 모른다.
이미 지나버린 계약기간. 그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했다. 약간 이판사판 느낌으로, 이미 지나버렸는데 더 좋은 작품 만들기 위해 시간이 조금 더 걸리면 어때!라는 마음으로 바뀌고 나니 생각이 더 유연해지고 그림이 더 잘 그려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11월에 다시 편집팀과 만났을 때, 드디어 나의 그림책의 전체적인 구성과 그림 스타일이 확정되었다. 1년 동안 뭐 했냐고? 그것도 안 정해지고 출판 계약을 했다고? 아마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아마 그림책 작업도 작가마다, 출판사마다, 편집자마다 다 스타일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왕초보 그림책 작가는 계약을 한 후 책이 나오기까지 보통 나처럼 평균 2년은 걸린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아직 1년만 지났을 뿐, 1년은 남아있다(ㅎㅎㅎ). 그리고 편집자는 나에게 늘 하는 말이, “함께 만들어가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내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그려도, 늘 조언을 해주고 제안을 해주는 편집팀.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으면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한없이 부족한 나를 데리고 그림책 1권 내는데, 참 고생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보 작가들의 경우 그렇게 좋은 편집자를 만나서 좋은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을 몸으로 배우면서 좋은 그림책을 출판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편집자의 역할이라고 들었다.
다행히 나는 나의 작품을 아껴주고 소중히 해주며 함께 고민해 주는 편집팀을 만나, 나의 그림책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 한 장 한 장 그리고 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실 삽질도 많이 했고 우왕좌왕 컨셉이 흔들리기도 했고 이야기가 산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나는 스토리를 구성하는 법이 나아졌고 그림실력도 좋아졌다.
작가님, 초보 작가님치고는 그림책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시네요.
이러한 칭찬 아닌 칭찬을 지난 미팅 때 받았다. 아마도 이는 내가 한국그림책학교에서 그림책교육전문가 과정을 들으며 그림책에 대해 공부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수영’을 하면서 적어도 1주일에 1번, 양질의 그림책을 해부하고 깊이 읽게 읽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이론으로는 어떤 그림책이 좋은 그림책이고 완벽한 그림책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를 나의 그림책에 적용시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긴 하다. 그럼에도 그렇게 편집자님이 칭찬을 해주셔서 내가 그동안 헛되어 보내지 않았다는 것에 뿌듯했다.
내년 봄에 나올 예정이었던 나의 그림책은 과연 정말 그때 나올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2월에 일러스트페어 때 그림책도 함께 선보이고 싶지만, 그때까지 출판되려면… 왠지 오늘부터 매일 몇 시간씩 그림만 그려야 할 것 같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가능한 일로 바꾸게 하는 것이 또 나의 장점이지!라고 생각하고 올해 남은 1달 동안 미친 듯이(?) 작업을 마무리해 보려고 한다. 비록 계약 기간은 넘겼지만, 예정대로 내년 봄에 나의 그림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길. 만약 봄에 못 나오더라도 서운해하지 말길, 스스로에게 약속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