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림책은 딱히 계절성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봄 느낌과 어울리는 장면이 있어서 봄에 나오면 좋겠다는 말을 출판사에서 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은 출판 업계의 빙하기라 불릴 정도로 잘 팔리지 않는 시기이고 봄과 가을이 그나마 좀 팔린다고 한다. 다행히 봄에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80% 정도 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완성도 있게 그림을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고를 손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작가님, 우리 마지막 미팅 한 번 할까요~ 표지, 제목, 면지 등 이야기 나누려고요~
그림책마다 또는 작가마다 제목이 만들어지는 시기가 다르다. 사실 나는 가제로 계속 쓰던 제목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 제목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더 잘 팔리는(?) 제목을 출판사에서 제안해 준다면 적극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제목과 표지 등을 정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마구 뛰었다.
오랜만에 출판사에 방문했다. 몇 번 바깥에서 만났었는데 몇 개월 만에 방문하니 또 설렌다. 출판사는 방송국이 즐비한 곳에 위치하다 보니 그 건물 주변에 가기만 해도 괜히 두리번거리게 된다. 혹시나 연예인을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그러나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오랜만에 편집장님과 디자인 팀장님과 만났다. 먼저 식사를 하고 미팅을 하자고 해서 우리는 찜닭 집으로 향했다. 밥 먹으면서는 작업 이야기보다 사는 이야기, 반려동물 이야기 등으로 화기애애하게 시간을 보냈다. 매번 얻어먹은 것이 미안해, 이번에는 커피를 내가 샀다. 감사한 마음을 커피로만 표현이 되겠냐만은 작은 마음이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게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회의실에 자리 잡았다. 우선 내가 작업한 내용물의 퀄리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나는 프로크리에이트로 작업을 했는데, 포토샵으로 열어 보니 색감이 전체적으로 톤다운 되어 있었다. 갑자기 멘붕이었다. 나는 포토샵을 만진 적이 없는데... 설마 다시 다 처음부터 그려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나처럼 프로크리에이트로 작업을 하는 작가님이 2분 계셔서 나중에 물어보니, 그분들은 프로크리에이트로 작업 후 디자인팀에 넘기면 그냥 알아서 해줬다고 해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출판사 팀장님도 예전에 프로크리에이트로 작업한 작가님이 직접 포토샵으로 후 작업을 하고 주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후 작업을 하시길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처음에는 멘붕이 와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었지만, 천천히 생각하니 앞으로도 계속 작업을 할 것인데 당연히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이 참에 해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내가 포토샵을 조금 배운 후 작업 수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제목은 내가 생각했던 제목 그대로 가자고 해서 기뻤다. 그리고 표지는 내가 생각한 것과 편집장님이 생각한 것, 2개를 그려보고 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요즘은 면지에도 스토리가 담기기 때문에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에 면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어보고 먼저 스케치를 해서 보내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림책을 쓰는 1년 반 동안, 마지막 장면만 몇 번이 바뀌었는지 모른다. 사실 지금도 계속 바뀌는 중이다.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칠해보고. 그런데 이상하게 마지막 장면만이 따로 노는 느낌이 난다. 다시 한번 수정 사항을 전달받고 다시 그리기로 했다.
약 2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나는 집에 오면서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일단 집에 있는 단 한대의 노트북은 포토샵을 돌리기에 매우 사양이 낮다. 예전에 한번 돌려봤는데, 레이어가 많으면 아주 아주 느려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이참에 컴퓨터를 사기에는 무리이다. 갑작스레 그렇게 많은 돈을 지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지금 페어 준비한다고 굿즈 주문한 값만 백만 원이 넘은 듯하다.) 포토샵을 어디서 하지... 피시방에 포토샵이 있을까?라는 매우 아마추어 적인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집에 와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근처에 사는 일러스트레이터인데, 늘 컴맹인 나를 도와주었던 그녀이다. 포토샵이 깔린 피시방은 절대 없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좌절하던 찰나, 그녀가 본인이 갖고 있는 노트북이 있는데 포토샵이 깔려 있다며 빌려준다는 것이 아닌가? 역시... 노느님...! 일단 후작업만 완성할 때까지만 빌려달라고 말을 하고 1개월 렌탈비를 지불했다. 사실 그녀에게 포토샵을 조금 배우려고 했으나, 페어 준비 등으로 바쁜 것 같아서 일단 혼자 해보자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빌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며칠을 생각해도 혼자 하면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은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카톡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 둘 넘겨 보다가... 어! 딸 친구의 엄마가 홍대 미대를 나오셔서 디자인팀에서 일하시지 않았나...? 집도 가깝고? 혹시... 하고 연락을 드려보니 흔쾌히 알려주시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나는 딸 친구 엄마에게 1시간 정도 그림책의 후 작업을 할 수 있게 간단한 포토샵 작업을 배웠다. 그녀는 극구 사례를 사양했지만, 나는 늘 '시간이 돈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남의 시간을 썼는데 그냥 보내드릴 수 없어서 작은 마음을 표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빌린 컴퓨터와 포토샵으로, 그리고 야메(?)로 배운 기술로 그림책의 후 작업 중이다. 프로크리에이트가 완벽하게 구현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마지막은 포토샵으로 손을 봐야 한다는 것에 실망스러웠다. 일러스트를 그리거나 굿즈를 만들 때는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출판물로 인쇄한다고 하니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이번에 이렇게 단기속성으로 배운 포토샵 기술로 앞으로도 그림책 작업을 할 수 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나는 그림책 한 권을 만드는데 뭐 하나 쉽게 되는 게 없다. 처음 출판사에 제출했던 더미북과 비교해도 제목 빼고는 다 바뀌었을 정도이며, 장면을 얼마나 많이 그렸는지. 이렇게 많이 그린 작가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나는 깜냥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색감마저 다 달라져서 포토샵으로 후 작업이라니... 정말 쉬운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나와주기만 한다면! 뭐든 해야지!
책이 잘 나와서 잘 팔리면 좋은 사양의 컴퓨터도 사고 포토샵도 최신 버전으로 구매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큰 꿈도 꾸어본다.
이제 정말 1달 내에 모든 작업을 끝내서 인쇄소에 넘기는 일만 남았다.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려낸 그림책이 정말 나온다고 생각하니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차분히 마무리까지 잘 해내길 바란다, 남개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