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마지막 주. 학교가 방학이고 복지관도 방학인데 드디어 방과 후 센터마저 방학을 하게 되어 하루 종일 민준이가 가야 할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살 게 별로 없어도 일부러 대형마트에도 갔다 오고, 아주 오랜만에 20킬로 거리에 있는 이케아에도 다녀오고 했지만 그래도 민준이와 보내는 하루하루는 참 길었다.
작년 한 해 코로나로 운동할 곳들이 다 문을 닫은 상황에서 할 수 없이 민준이와 등산을 다녔었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민준이는 등산 가는 걸 아주 즐거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루종일 너무 심심하니 등산이라도 가자 싶은데 폭염주의보가 계속 문자로 날아오고 있었다. 아침 일찍 가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며칠 동안 계속 민준이에게 제안을 했지만 이 녀석 반응이 아주 완강했다.
“싫어욧!!!”
금요일인 그날은 나 혼자서라도 간다 하고 아침부터 등산 이야기를 꺼냈지만 아니나 다를까 대답은 "NO"였다. 그런데 자꾸 뉴코아백화점에 간다고 했다. 며칠 전에 세일도 하길래 민준이랑 다녀왔었는데 자가용 타고 시원한 실내에 갔다 오니 좋았나 보았다.
“뉴코아 가고 싶어? 근데 등산 갔다 와야 가지. 등산 안 가면 안 갈 거야"
'등산 갔다 오면 아이스티 사준다'로 1년 동안 잘 꼬셨었는데 그날은 아이스티로는 안 넘어오니 뉴코아로 미끼를 던져 봤는데 별로 반응이 안 좋았다.
“왜요? 왜요?? 왜요!!!!”
하긴 며칠 전에는 등산 안 가고도 뉴코아에 갔는데 그날은 갑자기 등산을 가야 갈 수 있다고 하니 민준이 입장에서는 화가 날 법도 했다.
어쨌든 아들을 운동시키고 싶은 엄마는 결국엔 혼자서 등산길에 나섰는데, 집을 나서면서는 속으로 ‘나도 가기 싫다, 진짜’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막상 초록초록 풍경이 눈에 보이자 내 마음도 환해졌다. 등산길은 덥지 않았고 오히려 시원했으며 등산객도 많지 않아서 틈틈이 마스크도 벗고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중간쯤 어딘가에서 대충 발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민준이와 다니던 코스 그대로 산에 올랐는데 추모공원 이정표가 보이는 지점, 등산한 지 1시간이 되는 곳에 다다르자 다리가 풀려 몸도 가볍고 활력이 넘쳤다. 내친김에 영장산 정상까지 가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아이들 점심을 차려줘야 하니 아쉽게 방향을 틀어 추모공원 쪽으로 내려갔다.
작년과 올해 뒷산으로 등산을 다니며 등산하고 내려오는 길에 항상 들러 아이스티를 사주었던 곳이 추모공원 카페였다. 그날 카페 언니는 민준이는 어디 있냐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항상 1+1으로 붙어 다녔는데 나 혼자 가니 이상했나 보았다.
"민준이는 오늘 안 온대요. 그냥 저 혼자 왔어요"
생각해보니 민준이와 딱 붙어 있은 5일 동안 커피 한잔 마실 새가 없었다. 민준이가 안 따라와 준 덕분에 나는 맛있는 아이스커피를 편하게 마실 여유를 가질 수가 있었다. 카페 야외 테이블에서 멋있는 풍경을 즐기며 언니랑 재밌게 수다를 떨고는 아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는 다음번엔 민준이도 꼭 왔으면 좋겠다 하시면서 "내가 사탕 사다 놓았다고 전해줘" 하셨다.
집에 도착해서 민준이한테
“엄마는 등산 갔다가 추모 공원 카페 들러서 커피 마셨다아~~ 카페 이모가 민준이 오면 사탕 주신대. 내일 같이 등산 가자”
했는데 좀 망설이는 얼굴이긴 했지만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안 가요. 등산은 안 가요."
민준이는 어렸을때부터 자신이 원하지 않을 때는 사탕 같은 걸로 마음을 바꾸는 아이는 아니었다. 내가 볼때 민준이는 나름 지조 있는 남자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이후에도 계속 ‘다이소 가요, 뉴코아 가요, 북스리브로 서점 가요’ 가고 싶은 곳들 줄줄이 읊는데 오늘은 등산을 안 갔으니 아무 데도 안 간다고 말했다. 그런데 1시간쯤 지나자 슬그머니 민준이가 나한테 와서 말했다.
“내일 등산 갔다가 카페 가서 사탕 먹고, 뉴코아도 가고, 엄마~~”
ㅎㅎㅎ
"그래, 그래, 내일은 등산 같이 가자."
나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으며 민준이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날 처음으로 민준이와 밀당하는 게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진짜 꿀잼이었다. 예전에는 이 녀석이 내 의도대로 안 따라주면 '계속 이러면 어쩌지' 하는 걱정 가득에,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아이를 기다리며 ‘안 되면 그때 가서 또 생각해보지’ 하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변화한 내가 참 신기했다. 그리고 내가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주니 민준이도 여러 번 생각해보고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했다.
아이가 어릴 때 진작에 이런 여유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으면, 경험하면서 내 마음을 자꾸 다스리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여유였다. "꼭 이렇게 해야 돼"에서 "하면 좋겠지만 못해도 괜찮아"로 마음을 돌려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나 지나간 시간이 그냥 흘러 보낸 시간은 아니었던 게 참 감사하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순간들 앞에서 화를 내고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음번에는 어떻게 하면 다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는지를 매번 고민했던 거 같다. 고민의 답은 쉽게 찾기 어려운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이 자주 들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시간들이 결국엔 나를 성장시켜 주었다.
민준이와의 밀당이 재미있어지다니... 10년 전, 15년 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요즘 나는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