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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14. 2024

진상의 나라

공정한 사회가 건전한 사회라는 착각에 관하여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얼마 전, 좋은 기회가 생겨 우프 코리아(wwoof korea)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활동가로서 함께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하루 종일 짧은 목줄에 묶인 채 살아가는 시고르자브종 개들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열린 프로젝트인데, 감사하게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나 같은 경우 자연농이나 대안 경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우프를 이미 알고 있던 상태였다. 해외 우핑을 통해서 자연농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줄곧 있었다. 우프 코리아에서 진행하는 국내 우핑 활동에도 참여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왔다. 어떻게든 우프 쪽이랑 연을 맺고 싶다, 그 마음을 하늘이 알아주었는지 정말로 네트워크가 생겼다.



우프코리아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복합문화공간 곳. 여기에서 첫번째 활동가 회의가 열렸다.




나는 이 프로젝트에 윤슬이라는 활동명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첫 모임에서 각자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나누었다. 놀랐던 것은, 모임에 오신 분들 대부분이 우프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모르고 계신다는 거였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우프를 처음 들어보신다고 했다. 아직 우프가 국내에선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다.



우프는 World-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의 약자로 1971년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친환경 농가 등에서 하루에 반나절 일손을 도와주고 숙식을 제공받는 것으로 전 세계 150여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 글로벌 네트워크 활동입니다.
우프는 신뢰와 지속 가능한 글로벌 커뮤니티 구축을 목표로, “비화폐 교환”에 따른 문화 및 교육 경험을 촉진하며, 유기농가와 자원봉사를 연결하는 세계적인 운동입니다.


출처: https://wwoofkorea.org/wwoof-is/



우프코리아 홈페이지의 설명이다. 우프는 유기농, 친환경 농법을 실천하고 있는 농가에서 필요한 일손을 보태주고, 숙식을 제공받는 노동 교환 커뮤니티다. 단순히 노동력과 숙식이 화폐를 거치지 않고 물물 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대지를 풍요롭게 가꾸며 자립적인 삶을 위한 기틀을 마련한다는 점에서도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의 형태를 구현하는 가장 선진적인 시도가 아닐까 싶다. 비슷하게 헬프엑스나 워커웨이 등 노동-숙식 교환 여행을 지원하는 커뮤니티들이 존재하지만 우프는 농촌, (식량)생산지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해외(주로 선진국)에서는 대안적인 삶에 대한 갈망, 욕구 등으로 우프의 인지도가 국내보다 높은 편이다. 무전 여행이나 평화 여행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고. 인간과 자연 모두 숨 돌릴 틈이 있는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우프를 많이 이용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68혁명의 여파가 있지 않나 싶다. 국내에서는 68년도에 생태적 자각, 문명의 회의는 커녕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국가를 어떻게든 '부자 나라'로 일으켜 세우기 바빴다. 그 이후로도 한국에선 성장 일변도의 길을 걸었다. 기술, 발전, 우주, 전쟁, 경쟁. 이게 맞나, 하고 되돌아 볼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요즘 귀농, 귀촌, 삶의 여유에 대해 국내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는 한 것 같다. 시골언니 프로젝트나 워케이션, 5도 2촌 등 다양한 형태로 귀농어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한국에서 농촌은 여전히 대안이 아니라 휴식과 은퇴 후 2의 인생 정도의 로망에만 그치는 분위기다. 일에 지친 직장인들을 위한 일상 도피 상품과 같이 조금 상업주의적인 방식으로 흘러간다.


게다가 국내의 귀농 트렌드는 여전히 ICT 스마트팜, 대농, 부자 영농 등등인 점이 상당히 거북하다. 도시에서의 마음 그대로 시골에 내려온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텐데. 국가에서도 소농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기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사실 자급자립 소농인데 말이다.


우프는 이러한 정신에서 시작된 대안 모색의 커뮤니티다. 우리가 돈을 매개로 살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두가 스스로의 의식주를 가꾼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구든 환대하며 맞이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등등. 자본주의 사회에선 감히 꿈도 못 꾸는 일을 우프는 실험한다. 우프는 한 번 뿐인 인생 자율적으로 살아가자는 자기 돌봄, 생태적으로 살아가자는 지구 돌봄, 이방인을 환영해주고 보살펴주자는 관계 돌봄의 정신을 실현한다. 딱 각박한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그것들이다.







공정성만 외치는 한국 사회, 이대로 괜찮은가


요즘 세상이 아주 뒤숭숭하다. 길거리만 걸어다녀도 뭔가 날이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미세먼지 만큼이나 유해한 일들이 한국의 대기를 뒤덮고 있다. 사람들의 정서는 불만과 불안으로 물들었다. 그런 파동이 느껴진다. 누구라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기를 쓴다.


나는 노오력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네가 뭔데 거저먹으려고 난리야. 아무리 뭣같아도 게으른 놈들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보겠으니 너도 한 번 당해 봐. 한국 사회의 기본 마인드가 이렇다. '내가 내 인생 희생한 만큼 보상 받아야겠고, 잘 되고 싶으면 너도 네 인생 갈아넣든가'라는 식이다. 늘 사회의 화두는 '공정성'이다. 그놈의 공정, 공정. 자본주의는 공정해야 하고, 공정하다는 믿음이 그 무엇보다 견고하다. 하나님 부처님 안 믿는 사람도 자본은 숭배한다.


부자는 노력해서 공정하게 부자가 되었고 빈자는 게을러서 빈자가 되었으니 그렇게 살아 마땅하다. 자본주의 복음 제1장 1절이다. 아무도 이게 타당한 일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롤모델은 언제나 억만장자다. 부자의 법칙이니 돈의 법칙이니 뭐니 하는 책이 징그럽게 쏟아져 나온다. 일론머스크 가라사대 아침 다섯시에 기상할 것이며...


그런데 이런 믿음이 팽배해지고 세상은 더 살기 좋아졌는가? 살기 좋아지긴 커녕 살림살이는 밤고구마 만큼이나 팍팍해졌다. 목구녕이 턱턱 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밤고구마는 그래도 달기라도 하지. 현실은 한약보다 쓰다. 도시민들의 분노나 욕구불만은 배설되지 못하고 날로 날로 쌓인다. 소비자가 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계산하기, 따지기, 갖고 싶다 떼쓰기, 마음에 안 든다 징징거리기 밖에 없다. 집 안에서 홈쇼핑, 먹방, 여행 방송 보면서 먹고 싶다, 가고 싶다, 사고 싶다 징징거리는 어린 아이로 전락한다. 정신은 점점 유아기 수준으로 퇴화한다. 이래서 하버트 마르쿠제는 소비자를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했구나.


도시 사람들은 생산자나 생산국의 노고따위 안중에도 없고 그저 배달시킨 음식이 맛 없다, 식었다, 늦는다, 비싸다 짜증내기 바쁘다. 정작 손 하나 까딱 않고 당신네 식탁에 완성된 음식이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력과 자원이 쓰였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철부지도 보통 철부지가 아니다. 철없는 도시민 답게 겨울에도 봄딸기를 찾고 샤인머스캣을 먹는다.


공정성이라는 함정카드는 여기에서 발동한다. 사람이 돈을 매개로 "거래"를 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손익을 따지기 마련이다. "거래"에서는 내가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거래의 원칙은 "공정성"이다.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내가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적다고 생각되면 불만이 생긴다.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화폐 경제의 지배적 정신은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불만의 정신이다.


하지만 주고 받음이 거래가 아니라 관계를 매개로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컨대 누군가가 머리를 자르고 싶어 한다고 하자. 머리 손질에 재주가 있는 사람이 그를 도와주고 싶어서, 즐겁고 싶어서 머리를 잘라주었다. 여기서 머리를 손질 받은 사람은 그 마음이 고마워서라도 머리 모양이 완벽하네 마네를 따지며 지랄 부리기엔 미안해진다.


마침 머리 손질을 받은 사람은 요리에 재주가 있어서 답례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서로가 좋아하는 일로 상대방을 위해 선물을 한 셈이므로 여기에서 오가는 정서는 감사와 호혜다. 도와주고 싶다, 보답하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이 지배적이다. 얻어먹는 밥이 맛이 있네 없네 툴툴거리는 행위가 무례하다는 것 쯤은 MZ들도 알 것이다.


다시 공정이라는 단어로 돌아가보자. 공정성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뭐가 있을까? 공정한 봉사, 공정한 사랑, 공정한 신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다소 어색한 수식어처럼 느껴진다. 봉사, 사랑, 신뢰라는 말 앞에 공정이 붙는 것은 글쎄,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러나 공정한 거래, 공정한 경쟁, 공정한 싸움, 공정한 경기... 이러한 말들은 비교적 친숙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붙으니 공정이라는 수식어가 아주 익숙하다. 얼핏 좋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뒤에 붙는 단어를 살펴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사랑, 봉사, 신뢰와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그렇다.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전투적인 행위다. 기쁨과 보람이 퐁퐁 샘솟고 평화로운 성격의 이완된 정서와는 다르다. 공정은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는 일에 붙는다.


내가 학창시절 놀지도 못하고 친구를 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면, 그게 잘못되었다고 느낀다면 우리 세대에서 맥을 끊자고 이야기해야 건전한 사회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내가 그렇게 노력해서 명문대를 나왔는데, 어떻게 지잡대 출신이랑 감히 같은 취급을 하려 드냐는 마인드로 이 악순환을 대물림시킨다. 이런 걸 두고 성숙한 시민 의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평생을 그렇게 사춘기 어린애같은 관점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런 게 진정한 성장이라 할 수 있는가? 이대남의 절규, 세대갈등, 극단적 개인주의는 다 이런 공정 타령에서 시작되었다. 공정이라는 말은 '내 이익만 제대로 챙겨받으면 아무 문제 없다'라는 이기주의의 함축어다.


그렇게 전국민이 '진상 손님화' 되어간다. 진상 손님 마인드가 디폴트인 사회를 두고 정말 건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돈을 매개로 하는 화폐 경제 기반의 사회는 결코 건전한 사회일 수 없다. 도시가 점점 각박해지는 이유는 경제와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도록 그 권리를 위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봉사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노오력했으니 정당하다는 생각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깨지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내가 노오력해서 얻은 결과이니 부자가 되는 건 타당하다. 반면 빈자가 되는 것은 게으른 탓이니 그 또한 타당하다. 이게 얼마나 헛소리인지는 부자와 빈자의 주체를 개인이 아니라 국가로 바꾸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다.


세계의 부는 한정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일론머스크가 될 순 없다. 그걸 알면서도 저 사람처럼 돈을 많이 버는 게 우리의 궁극적 목표라고 이야기 하는 건 완전히 기만이다.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없는 걸 뻔히 알면서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삼으라는 말인가. 1등은 꼴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부자는 가난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빛은 그림자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불가분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부자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빈자 또한 존재해야 한다. 그게 누가 됐던간에. 이건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업을 해서 잘 됐다는 말은 안 그래도 팍팍한 서민들 살림살이 털어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과 같다. 남의 지갑에서 돈이 빠져나와야 내 지갑으로 온다. 이런 자명한 사실도 모르는 건 아닐 거라 믿고 싶다. 이건 약탈이다. 실제로 세계의 모든 식민지배는 이런 식으로 탄생했다. 좋은 것을 줄테니 당신의 자급 생계 수단을 내 손에 넘기시오.


선진 유럽 국가의 식민지배 또한 노오력의 산물이다. 따지고 보면 조선 사람들 국내에만 틀어 박혀 탱자탱자 안주하고 있을 때 유럽은 부지런하게 빨빨거리면서 온 세상을 후비고 다닌 결과로 지지 않는 태양을 얻은 셈이니 말이다. 그들도 나름 머리를 써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고 자원을 갈취했다. 능력주의, 노력주의 논리대로면 영국은 노력한 대가로 땅부자가 되었다.


어쩐지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나. 우리가 식민지배의 역사는 잘못된 것이라 직시하고 지탄한다. 아무도 그것을 대단하다며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국가가 노력해서 경쟁(전쟁)하고 침략하고 영토를 넓히고 부자가 된 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 그 주체가 개인으로 바뀌면 잘못되었음을 모르는 까. 부가 개인의 노력으로 좌우된다는 논리는 식민지배의 이데올로기와 동일하게 작용한다. 노력하면 된다고? 기껏 노력해서 남들과 경쟁이나 하는 게 건전한 사회냐고 다시 한 번 묻는다.


우리는 이제 공정이라는 논의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공정이 아니라 공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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