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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l 24. 2024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의 진짜 의미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

0.

이상하다. 분명 살고 싶어서 왔는데.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여기에 왔는데, 자꾸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 살기 싫다. 동시에 너무 살고 싶다는 마음이 반작용처럼 떠오른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그냥 살기 싫은 게 아니구나. "이렇게" 살기 싫은 거구나. 살기 싫다는 말은 "이런" 삶을 끝내고 싶다는 거다.


아무래도 시작이 잘못 된 모양이다. 삶을 배우고 싶어서 떠났다면 그걸 먼저 했어야 됐다. 그래야  뭐 좋은 기억이라도 남겨서 버틸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었을 텐데. 뭐 때문에 내 노동력을 반값으로 삭감해가면서까지 일부터 하겠다고 설쳤던 걸까. 후회막심이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여기에 온 목적도,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도 희미해져 갔다. 나는 매일을 사는 게 아니라 버텼다.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견뎌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그냥 알바를 할 거라면 한국에 있어도 되잖아. 못 알아듣는 말을 이해하려 애써가며 다리가 저리도록 일하는 대가가 너무나도 짰다. 염전보다 짜기 그지없었다. 의미 없는 노동에 온 몸이 너덜거렸다. 살아있지만 사는 게 아닌 듯 했다.




1.

일본은 대부분 시프트 근무제였다. 노동자가 언제, 몇시부터 몇시까지 일할 지 확실하게 알고 계약할 수 있는 한국과 달랐다. 일단 입사부터 당하고, 근무 시간도 휴일도 통보받는 식이다. 내가 일하는 시간은 오후 2시 반부터 오후 11시까지. 저녁 8시 반이 넘어가면 피곤하고 졸리고 지쳤다. 보통 휴게시간은 4시 전후로 받는데 그렇게 되면 거의 6~7시간 가량을 저녁밥도 먹지 못하고 버텨야 한다. 저녁 타임에 일 하면서 고작 며칠만에 온 몸의 뼈가 선명하게 보이도록 말라갔다.


더는 이렇게 살다간 타지에서 죽겠다 싶어 담당자에게 근무 부서 변경을 요청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세상에 V쉬운V일은 없다는 둥의 꼰대같은 발언 뿐이었다. 일본은 노동자에게 아무런 결정 권한도 주지 않는게 관습이냐며 한 마디 하려다 말았다.


짜디 짠 급료와 박하디 박한 세금 수탈 속에서 살아남기엔 물가가 그다지 저렴하지도 않았다. 오키나와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그런 건지. 과일이 미친듯이 비쌌다. 어디 시장이라도 가서 비교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차가 있었다면 시장에 가봤을 테지만 불행히도 나는 무면허였다. 열대 과일 천지인 오키나와에서 과일조차 비싸 살 엄두도 못낸다니. 어이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반기를 들고 반항하기 보다 수긍하고 감내하는 느낌이었다. 높은 세금에도 그러려니. 비싼 물가에도 그러려니. 거지같은 노동 환경에도 그러려니. 낮은 임금에도 그러려니. 다들 불만이 없는 건가. 손님들을 상대할 때마다 본인의 삶에 정말로 불만이 없는 건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안쓰러웠다. 그렇게 그러려니 하다가 원전에서 방사능에 피폭당해 90분 만에 돌연사하는 산재까지도 발생한다.




2.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뭐든 못할 게 없다는 마음과 내가 여기까지 와서 왜 이 고생을 하나 싶은 현타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다. 한국 절반 수준의 급료, 할 일도 없는데 길기만 한 노동 시간. 매장 안에서 매일 반복되는 하루. 시간이 죽어라 안 간다. 따분하다. 괴롭다. 힘들다. 이게 사는 건가.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사는 게 뭐냐고 물으면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닐 것 같은데. 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는 삼개월씩이나 살고 싶지 않았다.


자살도 과로사도 사회적 타살이다. 일본은 과로사의 나라고, 한국은 자살의 국가다. 더는 살지 못해 죽거나 더는 못 살겠다며 죽는다. 팍팍한 살림 살이,  쉬는 좀비가 된 듯한 일상. 삶을 노동에 바치는 순간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내 삶의 주도권이 회사와 상사에게 넘어간다.


만약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사회적으로 정형화 되어 있는 경우, 이 때는 인생 전체가 주변인들에게 감시당한다. 당장 나 역시도 대학을 졸업했다 하니 수영장에서 만나는 할머니들마다 취업 얘기만 주구장창 해댔다. 네,네. 당신들 손주 분들한테나 신경쓰세요. 제 인생 제가 알아서 살게요.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3.

인간은 에고를 넘어서 진정한 자아를 얻고, 그 자아를 또 넘어서 "모든 게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식의 초자아로 나아가야 한다. 그 연결감을 깨닫지 않으면 누구도 괴로운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노동하는 삶은 에고에서 벗어날 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다들 무의식적으로 고통을 느낀다. 이게 맞아? 이게 사는 게 맞아? 숨은 쉬는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없으니 차라리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건 사실 "진짜" 살고 싶다는 몸과 마음의 증거다. 사람들이 청산하고 싶은 건 목숨 그 자체가 아니다. 삶의 주도권이 나에게 없는 "가짜" 인생을 청산하고 싶은 거다.



나는 "진짜" 인생을 살고 싶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 사회는 단절의 삶이자 독선적인 삶이다. 나부터 살아야 하고, 내가 돋보여야 하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야만 근근이 먹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우선 부여받은 자유 의지를 사용할 수 없으니 영혼이 죽어간다.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디지털 노마드나 셀프 브랜딩, 욜로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그 또한 자본의 방식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또배기 인생 끝판왕은 사실 노장사상 도가철학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이다.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어 있고, 모든 일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이어짐의 깨달음 속에서 내가 지구의 일부가 되는 삶이다. 어머니 지구에 완연히 녹아드는 삶. 세계의 조화에 물들어 사는 삶. 만물과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추어 가는 삶. 독선적인 삶이 아니라 어우러지는 삶. 이 땅과 바다가 돌고 돌아 내가 되고, 다시 내가 이 땅과 바다로 돌아가는 순환의 삶 말이다.


그런 진짜 인생을 배우고 싶어 이 땅을 찾아 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죽고 싶은 충동과 살고 싶은 간절함이 대립한다. 나는 이 시기를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 앞으로 남은 기간을 어떤 마음으로 이겨내야 좋을지, 그 기간이 지나가면 무엇을 해야 내가 지향하는 진짜 삶에 가까워질 수 있을지가 현 최대의 난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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