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Aug 01. 2024

정말로 "나"의 문제라고 생각해?

문제가 있는 건 "체제"다

극한의 노동환경, 시프트 제도

일본은 대개 시프트 제도로 근무하는 곳이 많은 듯하다.  시프트 제도의 문제가 뭐냐면, 근무자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회사가 나오라는 시간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야심한 시각까지 일을 시켜도, 꼭두새벽에 출근을 요구해도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시간에, 어느 요일에 일하게 될지 모든 것이 미지수다. 채용되는 순간부터 회사가 정해 놓은대로 살아야 한다. 거기에 노동자의 의지는 개입할 수 없다. 상호 협의나 사전 고지가 아니라 일방 통보다. 당신은 앞으로 밤에 근무하세요, 하면 그냥 그런 줄 알아야 하는 거다.


이 염병할 시프트 제도가 사람을 아주 쥐 잡듯이 잡는다. 휴게 시간조차도 조율할 수 없고, 회사가 밥 먹으라는 시간에 먹어야 한다. 그것도 매일 랜덤이다. 오늘은 점심을 먹게 될지 점저를 먹게 될지도 알 수가 없다. 가령 2시 반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근무하는 시프트를 받았다고 하자. 상식적으로 저녁 6시 쯤 휴게시간을 주고 저녁을 먹으라고 할 것 같지만 이 곳은 그렇지 않았다. 방금 점심 먹고 출근했는데 3시 반에 밥을 먹고 오란다. 이게 말이나 되나. 식사를 4시 경에 마치고 밤 11시까지 저녁 식사 하나 못 해가며 일해야 하는 거다. 이런 정신나간 시프트에 눈 앞이 아찔했다. 노동 착취로 고발하고 싶은데 이거. 점심을 주는데 점심을 먹고 갈 수도 없고. 아니나 다를까, 7시간의 육체노동을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하고 견디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다.




꼰대 질량 보존의 법칙

이해와 존중같은 소리 하네. 어딜가나 말귀 안 통하는 꼰대는 존재했다. 일하다 죽을 것 같아서 근무 부서를 바꾸고 싶다고 상담했더니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둥 지껄였던 담당자도 그렇고. 매장 매니저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못 버티겠어서 매니저에게 지금 타임으로 근무하며 단 며칠만에 이러다 쓰러질지 몰라 무서울 정도로 살이 빠졌다고 얘기 했더니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며 나에게 한 마디 하는 것이었다.


아침도 먹고 점심도 먹는데 살이 왜 빠지냐, 일 끝나고 야식은 왜 안 먹냐, 일부러 두 끼만 먹는 사람도 있는데 왜 넌 살이 빠지냐, 왜 힘드냐 등등.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는 태도로 자길 납득시켜 보란다. 전혀 예상도 못했던 반응이라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저녁을 못먹어 살이 빠졌다는 사람한테 말을 저렇게 할 수가 있지? 이게 인간인가 싶었다. 애초에 말도 안되는 시간에 휴게를 주고 말도 안되는 시간까지 일을 시켜 놓고 말이다. 도리어 '괜찮지 않은 나'를 탓하며 이상한 사람 취급하다니. 야식 먹으면 역류성 식도염 생긴다고요.


아침 시프트로 옮겨가고 싶으면 지금보다 일을 더 잘해야 한다며 나를 구박하기까지 했다. 재고  위치도 모르고, 정산도 매번 실수하고, 나보다 일 더 못하는 선배도 처음부터 아침 근무했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외노자 차별하나 싶다.




사측이세요?

노측이시라면 노동 봉기 부탁드립니다.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살자고 하는 말이다. 죽자고 덤벼들지 않으면 죽는다. 타지에서 원치도 않는 매점 알바나 하다가 아사하고 싶진 않았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근무 시간을 며칠이라도 좋으니 조정해 줄 수 없느냐, 적어도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시간으로 휴게를 미뤄줄 순 없느냐고 물었다. 호텔에서는 안 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아니, 부서 변경도 안 돼, 근무 시간 조정도 안 돼, 하다못해 휴게시간 조정도 안 돼. 도대체 노동자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노동자가 아니라 그냥 노예였다. 근무 계약의 탈을 쓴 노예 계약이었던 거다. 이렇게까지 회사가 근로자를 데리고 갑질을 일삼는데 아무도 분개하는 사람이 없는 건가. 쓰러질 것 같다고까지 말했는데도 바꿔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그냥 일하라는 건 살인 방조아닌가.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이러니까 산재가 생기지. 과연 과로사의 고유명사 일본다웠다. 노동자는 인간이 아니라 걸레짝이다. 짜낼 수 있을 때까지 있는 힘껏 쥐어짜내다가 마침내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게 될 때 그냥 버리고 바꾸면 그만인 거다.


나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인간적으로 일하길 원했을 뿐인데, 혼자만 이 노동 환경을 이겨내지 못한 나약하고 유별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거지?


누가봐도 부당한데 못 버티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간절하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당한다. 사회의 문제를 개인이 짊어진다. 체제의 문제를 두고 개인에게 손가락질 한다. 순식간에 문제있는 사람, 게으른 사람, 열정 없는 사람 등등으로 낙인찍히고 개개인은 체제의 방패가 되어 대신 욕을 먹는다. 내가 못나서, 내가 나약해서. 그런 식으로 개인에게 모든 원인이 있는 것처럼 사고하게 만든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혁명을 피해간다. 프랑스 혁명보다도 더 불평등한 사회에서 (토마 피케티의 피케티 지수 참조) 아무도 사회를 뒤엎으려 들고 일어나지 않는 이유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민주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는 민주성을 파괴하여 발생한 체제이다. 둘은 상호 배타적 관계에 있다.


왜 나의 생계를 남이 쥐고 있으며, 내가 살고 싶으면 타인에게 어필해야 하는 거지? 왜 내 인생의 주도권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있지? 삶은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지는 것인데 어째서 내가 이렇게 간절히 살아야겠다는 것을 보여주고 평가받아야 하는 거지?생각해보면 민주주의의 코빼기도 볼 수 없는 게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 아닌가.


농민 봉기 일으키듯 노동 봉기 일으켜도 이상할 게 없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듯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 밥과 잠과 쉼을 달라고 21세기가 되도록 여전히 외쳐야만 하는 현실이라니. 그런데 아무도 외치지 않는다. 밥도 잠도 쉼도 포기하고 노동하는 사람은 갓생으로 올려치기 당하거나 가난과 무능의 대명사로 내려치기 당한다. 밥과 잠과 쉼은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서 살아가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다.      그런데 쉴 새 없이 자본을 생산해 내야 하는 이데올로기 속에선 밥, 잠, 쉼 만한 방해 요소가 없다. 사측은 이걸 최대한 배제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사측이세요?"  밈이 새삼스레 반갑다. 여태 사측도 아니면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본의 원리에 입각해 사고해왔는가. 우리는 배고프고 졸리고 힘 없는 약자임에도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노측이라면 함께 벗어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자본의 세뇌로부터, 체제의 순응으로부터.


이전 14화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의 진짜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