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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롱이 Oct 21. 2021

부캐를 가진 선생님

선생님의 부캐는 영화감독

 나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며 살았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만 가면, 대학교 때는 취업만 하면, 이런 식이다. 어릴 때는 만화가, 커서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꿈보다 현실이라는 사회적 시류에 편승해 결국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게 됐다. 아마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되면, 더 많은 대출이나 사회적 책임을 지게 되면, 할 수 있는 일의 폭은 더 좁아질 거다. 그렇기에 ‘현실’이라는 핑계로 미뤄왔던 일을, 이제는 더이상 미룰 명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 시절 친구들의 꿈은 참 다양했다. 대통령, 과학자, 미술가, 가수, 프로게이머 등. 그랬던 꿈들이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자 약속이라도 한 듯 대기업과 공무원 같은 것들로 모여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위인전을 읽으며 소수의 위대한 성공을 동경했지만, 지금은 안정적인 길을 찾아간 다수의 성공담이 더 와닿는다. 세상을 알고 많이 배울수록 불가능의 언어는 일상이 됐고, 이제는 꿈꿀 수 있는 것만 꾸게 됐다.


 하지만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이제는 직업 안에만 꿈을 가둬두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됐다. 대표적인 예로 바로 ‘부캐’가 있다. 부캐의 뜻은 본래 게임에서 사용하던 용어로, 주로 사용하는 캐릭터 이외에 부차적인 목적을 위해 추가로 만든 캐릭터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게임 속에서는 캐릭터를 여러 개 만들어도 괜찮다. 언제든 새로운 캐릭터와 스토리를 경험하고 싶다면 그냥 만들고 경험할 수 있다. 그러다 마음에 안 들면 본 캐릭터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캐릭터를 키워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이미 선생님이 되었다면 마음껏 부캐를 키워보라고 말하고 싶다. 마땅한 직업 없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찍다가 실패하면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크지만, 선생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저술, 디자인, 사진, 영화와 같은 분야를 엘리트주의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SNS에 글을 쓰고, 아이패드로 드로잉을 하며, 스마트폰으로 전문가다운 사진을 찍고, 1인 스튜디오로 유튜버가 되는 시대가 됐다. 새로운 시대에서는 많은 일을 인공지능과 AI가 대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일은 대체 가능성이 낮다. 인간에게는 로봇이 흉내낼 수 없는, 원본을 창조해낼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아는 어떤 선생님은 인디밴드 보컬이 되었다. 퇴근 후에는 보컬학원에 다니고 악기도 배운다. 주말에는 밴드 합주를 하거나 작은 공연장에서 노래를 부른다. 지금은 이미 여러 곡의 음원을 출시한 어엿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또 어떤 선생님은 평소 독서를 좋아하고 글 쓰는 것이 취미였기에 작가가 되었다.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고 칼럼에 글을 기고하기도 한다. 누구는 유튜버, 누구는 사진가, 누구는 자전거 동호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정말 멋진 부캐다.

 혹자는 선생님의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할 수 있다. 이해한다. 나도 3~4년 차까지는 학교 일만으로도 힘겨웠고 집에 오면 곧장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노하우가 쌓이는 법이다. 지금은 적은 에너지를 들이고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남는 시간을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일상의 나태함에 서서히 젖어 들었다. 그러다가 독서 모임과 주변의 훌륭한 선생님들을 통해 신선한 자극을 받게 되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묻어뒀던 꿈을 꺼내게 되었다.


 나는 줄곧 영화를 좋아했었다. 그래서 영화감독이 내 부캐가 되었다. 지금은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토론하고 있다. 쉴 때는 래퍼런스를 찾기 위해 고전 명작들을 즐겨 보며, 여행을 갈 때는 시나리오의 콘셉트와 맞는 장소를 일부러 방문한다. 물론 영화를 찍다가 엎어질 수도 있고, 찍고 난 뒤 소리소문없이 묻힐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감독은 나의 부캐일 뿐이다. 몇 번이고 다시 도전할 수 있으니 심리적 부담도 적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낼 수 있다.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더 이상 미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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