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무릎을 파고들어 내 앞에 앉으려고 한다. 엄마 무릎에 앉다 못해 두 다리가 마룻바닥에 파묻힐 정도로 밀어붙인다. "난 엄마랑 딱 붙어있을 거야."라는 말을 수시로 한다. 일상생활에서 성취감을 흠뻑 가져가는 듯한데, 그와 비례하여 긴장도도 높아졌다.
'아이가 크는 중이구나' 생각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은 한계에 부딪힌다. 품에 파고들어 온 몸을 밀어붙이는 아이를 밀어내고 싱크대 앞에 서고 싶다. 엄마가 제일 좋다며 얼굴 가득한 웃음을 보이는 아이를 향해 '그래그래' 건성으로 대답해버리고 만다. '엄마'하고 부르는 아이의 청명한 목소리에 모른 척 귀를 닫아버리고 싶다.
올 것이 온 거다.
다섯 살 은이에게 원더윅스가 찾아왔다.
아이를 키워본 엄마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단어.
원더윅스.
원더윅스는 아기가 정신적으로 급성장을 하는 시기를 뜻한다. 언어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아기가 불편한 감정을 울음이나 보챔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이 특별히 더 심해지는 때이다. 이앓이와 함께 두 돌 미만의 엄마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이다(나는 그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딸은 원더윅스를 꼬박꼬박 다 챙기고 넘어갔다. 특히 은이는 급성장기를 아주 야무지게 통과했다. 정말 많이 울고, 정말 많이 보챘다.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 포기를 하고 정신줄을 살짝 놓을 때쯤 방긋방긋 웃는 아이를 보고, 생후 주수를 따져보면 틀림없는 원더윅스였다.
원더윅스는 두 돌 미만의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인 줄 알았다. 영아의 발달을 다루는 많은 책(특히 수면 관련)에서 등장하는 원더윅스 표는 두 돌 미만까지만 정리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아이의 정신적 급성장기는 두 돌이 지나도 수시로 찾아왔다.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가 다르기에 특정한 시기를 규정지을 수 없을 뿐, 아이마다 정신적 성숙의 시기는 파도 타듯 찾아오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영아기에는 계단식으로 급성장기를 보낸 아이가 고작 한두 달 차이로 아름다운 우상향 곡선을 그리며 원만한 정신적 발달을 한다는 것은 부모의 바람일 뿐이다. 두 돌이 지나면 울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의사표현이 가능해지니, 아이의 성향에 맞추어 판단하라는 학자들의 배려였으리라.
어쨌든 다섯 살 아이도, 열다섯 살 아이도 정신적으로 급격히 성장하는 시기인 원더윅스를 지난다. 싹이 트고,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씨를 떨어뜨리듯 아이들도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을 겪는다.
다섯 살 은이는 원더윅스를 통과하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이 더 많아졌고, 해낸다는 기쁨이 훨씬 커졌다.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러지 못할 때 속상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간다. 엄마로부터 떨어져 어린이답게 행동하고 싶은 욕구가 자라고, 막상 떨어지고 나면 불안해지는 감정을 조절하는 중이다.
그럴듯하게 적자면 위와 같지만, 날것의 감정 그대로 표현하자면.
변덕이 죽 끓듯 하다.
하루 종일 함께 있는 주양육자의 입장에선 골 때리는 상황이 빈번히 일어난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눈 깜빡하는 1초 사이에 아이의 감정이 휙 휙 뒤집힌다.
부모는 어떤 때는 정신줄을 꽉 붙들어야 하고, 어떤 때는 정신줄을 살짝 놓고 가야 한다.
아이의 행동에 나의 감정이 불에 기름 부은 듯 끓어오를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아이의 격한 감정에 내가 어찌 대처할지 모를 때는, 정신을 살짝 놓고 상황을 유연하게 흘려보내도록 한다.
두 돌 이후의 원더윅스는 아이가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가는 소중한 시간이다. 아이가 감정을 익혀나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주고, 감정이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임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 좋다. 격한 감정으로 해선 안될 행동을 할 때는 안전한 선을 안내해주어야 한다.
당장은 서툴지만, 감정을 다루는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아이는 정서적으로 더욱 단단하게 성장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