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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Sep 21. 2021

습관과 관습

성인 ADHD를 알게 된 이십대 중반


습관(habit) 개인이 습득한 개개의 상습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것에 비해 관습은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의 사회 또는 사회적 집단 속에서 전통적으로  구성원의 대다수에 의해 상습적으로 수행되고 승인되어  행동양식 전반을 의미한다. *


 

'관습'이라는 글감을 받고 '습관'이라는 단어와 함께 오른 나의 ( 좋은) 습관  가지.

 

1. 어떤 일에 마감기한이 있으면 마감기한 임박할 때까지 미루고, 기한이 없으면 끝까지 미룬다. 그러다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친구들과 함께 가는  해외여행에 여권을 출국 바로   만들었다. 밍기적거리는 나를 보고 친구들이 “만약 쟤가 같이 여행을  가게 되면 이미 예약한 숙소비는 쟤도 내라고 해야겠지?”하고 상의도 했단다.


배탈이 나서 내과에서 링겔을 맞고, 치과에서 충치치료를 하고 사랑니를 뽑았다. 엄마가 들어준 보험들이 나의 일부 병원비를 내준다기에 진단서를 뽑아 두었는데, 그 서류 쪼가리 몇 개를 제출하기 귀찮아 아직도 보험금을 받지 못했다. 벌써 1-2년쯤 지난 일인데. 서류는 어디로 도망갔는지.

 

2. 물건 정리를 정말 못한다. 내 방이 없던 열 여덟 까지의 꼬꼬마 시절에는 오리다 만 종이들이나 책이나 잡히는 아무것들로 오빠 방을 어질러 놓았고, 내 방이 생긴 열 아홉 이후의 덜 꼬꼬마 시절에는 바닥과 침대에 물건과 옷가지들을 마구마구 펼쳐 두었다. 방에는 작은 내 몸 하나 누울 공간이 없어 자주 거실에서 자곤 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기숙사에 살 때는 침대와 책상 의자에 잔뜩 쌓인 옷가지들을 보며 친구들이 내 방이 제일 정신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사온지 이주가 넘어가는데도 방 안에 빨래건조대를 둘 곳도 없다.

 

3. 시간개념이 없다. 고등학교때는 교내 유일, 오롯이 지각만으로 벌점을 가득 채워 교내봉사로 청소를 하기도 하고, 1번에서 이야기했던 여행가는 날에도, 친구들은 내가 늦을 까봐 나에게만 약속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 말해주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시간을 잘 못 맞춘다. 늦을 것 같아 가는 내내 핸드폰을 붙들고 GPS를 새로고침, 새로고침하며 헐레벌떡 가거나, 삼십 분 이상을 일찍 가서 머쓱하게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한다.

 

그 외. 집중력과 주의력 없음, 산만함, 계획 없음, 충동적, 무언가 하나를 꾸준히 못함 … 등 비슷한 결의 습관들이 있다. 습관에 대한 웃픈 일화를 말하자면 끝도 없고, 어쩔 땐 친구들에게 내 인생은 시트콤이라 말하며 해탈한 듯 웃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내 버릇이 드러날 때면 그저 사과했다. 그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냐는 뉘앙스의 물음을 받으면 내심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는데. 진짜로.

 

얼마 전, 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인 ADHD’. 몇 번의 서치를 끝내고 ‘누가봐도 나잖아?’ 싶어 망설임 없이 병원예약을 하고, 검사를 받으러 갔다. (심지어 휴가 때 본가에 가기로 해놓고 그 날 예약을 잡아버려 예약 날짜도 한 번 미루고, 예약 당일 가다가 늦을 것 같아 연락 드려 시간도 한 번 미뤘다.)

 

검사 결과, 나는 성인 ADHD가 맞았다. 결과를 들으러 진료실의 문을 두드리자마자 선생님이 가장 먼저 내게 건네신 말은 "검사요, 졸면서 하신 거는 아니죠?"였다. 검사 결과지의 절반 이상이 빨강. 심지어 너무 쉽다고, 완전 잘한 것 같다고 생각했던 마지막 파트조차 빨간 불이었다.

나 하나의 습관이라 생각할 땐 그냥 모든 게 다 내 잘못 같았다. 그런데 자책은 그때 뿐,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내게 이런 습관들은 해결 못한 채 평생 가져가야 하는 결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고 누구에게고 피해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늘 사과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정말 오히려 내게 병명이 생긴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만의 습관이 아닌 내가 가진 병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관습이구나. 그리고 약물과 상담치료 어느 정도 개선이 가능한 부분이었구나. 하고.

 

“나는 원래 이런 습관을 가진 인간, 고칠 수 없음.”과 “나도 내가 잘못된 거 알고 고치고 싶은데 잘 안 돼. 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뿌에엥”을 왔다 갔다 하는 상태에서 “성인 ADHD 세계의 관습은 이러하고, 나아지는 사람도 있고 나도 나아질 수도 있으니 일단 뭐라도 해보자.”라는 상태로 넘어왔다. 부작용 테스트 겸 며칠 분량의 약을 처방 받아왔는데. 우습게도 아직 습관을 버리지 못해 그새 약 챙겨 먹는 걸 잊어버렸다.

 

내일 아침엔 약을 꼭 챙겨먹어야지!

 

* [네이버 지식백과] 관습 [custom, convention, 慣習]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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