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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Mar 18. 2024

콩 심은 데 콩도 나지만 풀도 납니다.

읽으면서 힐링되는 <시골 포레스트>

시골생활에서 시골러(시골사는 사람)를 가장 애먹이는 것은 무엇일까?


걸어가면 40분은 걸리는 학교? 하루에 2대뿐인 마을버스? (놓치면 6시간 기다리는 거 실화입니까?)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벌레? 물론 이 모든 것이 정답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지만, 사실 시골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단 한 글자.


풀. 그렇다. 풀이다.


풀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초본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통틀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지나가면서 보이는 거의 모든 초록 초록한 친구들은 다 풀이다.

두 글자로는 잡초. 세 글자로는 다죽ㅇ… (여기까지)


시골에서 풀은 사전보다 쉽게 정의할 수 있다. ‘내가 심지 않은 모든 초록색 친구들’은 전부 다 풀이다. 문제는 이 풀이 넘사벽 자립심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이다. 모 교육 회사의 광고노래처럼 ‘자기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척척척’에 딱 어울린다. 심은 적도 없고, 돌본 적도 없고, 물을 준 적도 없는데 스스로 나고 자란다. 생명력은 또 얼마나 질긴 가! 구슬땀 흘려가며 금이야 옥이야 손길을 주는 ‘심은 놈들’은 때때로 태풍에 쓰러져 죽고, 땡볕에 데어 죽고, 해충에 병들어 죽는데, 풀은 거의 불로장생이다.


시골에서 풀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함께 태어나, 여름에 그 성장이 빛을 발한다. 특히 여름. 여름 풀은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나면 자라있다. 오죽하면 여름철 집을 나서는 농사꾼에게 ‘어디가?’라고 물으면 열에 여덟은 ‘밭 매러 간다’라는 대답이 나올 정도다. 나머지 둘은 ‘논 매러 간다’일 수도 있는 게 함정.  


밭이나 논을 맨다는 말은 한 마디로 풀을 뽑는다는 말이다. 같은 표현으로 ‘밭에 김을 맨다’, ‘김 매러 간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풀을 다른 표현으로 ‘기음’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기음, 즉 김을 매러 간다라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김매는 일만 없었어도 시골의 삶은 그렇게 분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쯤에서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풀은 왜 뽑아야 하는 걸까?’

‘그냥 살게 두면 안 되는 걸까?’


풀이 고라니처럼 작물을 냠냠 쩝쩝 먹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해충처럼 병들게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왜 풀을 뽑아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러나 시골러로 살면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엄마는 물론 모든 동네분들이 풀을 뽑는 것을 보고 자란 경험에 비춰 그 이유를 생각해 봤다.


풀을 뽑는 첫 번째 이유는 작물을 위해서다.


풀도 생명이다. 생명은? 영양분을 먹고 자란다. 농사꾼은 내가 심은 강낭콩이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흙을 갈고, 비료를 주고, 때때로 물도 준다. 문제는 이 모든 노력을 풀도 함께 누리며 자란다는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당연히 원하지 않지만) 내 강낭콩 옆에 풀이 한 가득 있다면 강낭콩은 풀과 모든 것을 나눠야 한다. 마치 혼자 살 때는 치킨 한 마리가 온전히 나의 것이지만 온 가족이 함께 있을 때는 다리, 날개, 가슴살을 나눠 먹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강낭콩이 더 좋은 환경에서 충분한 영양분을 혼자 다 먹고 자라게 하려면 풀은 없어야 한다. 이 점이 풀을 뽑는 가장 근본적이고 객관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풀을 뽑는 두 번째 이유는 자기만족이다.


‘뜬금없이 무슨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풀을 뽑아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어쩌면 첫 번째 이유보다 더 큰 동기가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일찍 나선다고 해도 열대야가 지난 한 여름 새벽은 여전히 덥다. 한낮의 땡볕은 아니지만 그늘 하나 없는 밭에서 쭈그리고 앉아 김을 매고 있으면 등줄기를 따라 땀이 죽죽 흐른다. 하지만 흐르는 땀만큼 정직한 결과를 만드는 것이 농사다. 밭고랑을 따라 바쁘게 손을 놀리고 궁둥이를 들썩들썩 나아가면 어느새 가지고 온 자루에 지저분한 풀이 한 가득 담긴다. 그때쯤 모자를 벗어 선선한 바람을 맛보고 지나온 자리를 돌아본다. 풀이 한 가득 자라 있던 밭을 정리하는 것만큼 즉각적이고 확실한 만족을 주는 일이 또 있을까?


풀을 뽑는 마지막 이유는 눈치다.


맞다. ‘눈치를 보다’에서 등장하는 그 눈치가 맞다. 자연인처럼 혼자 산속에서 농사를 짓고 살지 않는 이상 내 밭을 구경하는 시선이 은근히 많다. 또 하나, 시골마을 특성상 저 밭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지나가는 개똥이도 알고 있다. 한 마디로 잡초가 무성한 밭은 곧 이래저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대상이 된다. ‘00이네는 농사 안 짓나?’, ‘여긴 콩밭이여 풀밭이여?’ 대략 이런 식이다. 물론 내 밭이고 내가 주인인데 남의 시선이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시골마을은 기본적으로 ‘게으름’에 엄격하고 박하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내가 들었던 유일한 잔소리가 ‘그렇게 게을러서 뭣 할래?’ 였다는 점만 생각해봐도 시골분들, 특히 어르신들에게 무성한 풀은 곧 게으름의 증명이다. 그러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한 번 게으르다는 이미지가 생기면 내 밭에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도 한 마디씩 보태기 마련이다. 잔소리는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심지도 않은 풀은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 걸까요?’


이론적으로 풀이 생기는 가장 큰 3가지 이유는 바람, 새, 동물이다. 잡초의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토양에 정착하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는 것이다. 새와 동물은 직접 씨앗을 나르는 것이 아니라 배설물로 씨앗을 여기저기 뿌린다. 어디서 무얼 먹는지 모르기에 이 풀들이 어디서 왔는지도 당연히 알 수 없다.


이런 배경에 더해 시골에는 풀이 잘 자랄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일단 시골에는 기본적으로 이런저런 풀이 많다. 길가에도 논과 밭 주변에도, 집을 빙빙 둘러서도 온통 풀이다. 굳이 바람, 새, 동물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풀 자체가 주변에 씨를 뿌리기 딱 좋은 환경이다. 그렇다 보니 더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한다. 귀찮다고 몇 번 못 본 척했다가는 들불처럼 번진 풀에 애써 심은 작물이 잠식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저놈의 풀들 박살을 내겠다’라는 생각도 금물이다. 풀은 절대 이길 수 없다. AI가 일상에 등장하는 이 시점에도 풀은 자라고 있지 않은가! 그런 풀을 이기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마음은 물론 몸까지 모두 나가 떨어진다. 부지런을 떨되 어느 정도 못 본 척 넘어가는 마음이 딱 적당하다.




생각해 보면 내 생활에도 잡초처럼 원치 않는 불청객이 등장할 때가 있다.


언제 싹을 틔었는지 금세 눈에 거슬릴 만큼 자라있는 경우도 흔하다. 풀은 뽑지 않으면 절대 죽지 않는다. 귀찮다고 외면하면 손쓸 수 없어 포기할 만큼 자라버린다. 혹시 내 주변에도 내가 지키고 싶은 무언가를 방해하는 잡초가 있지는 않은 지 둘러보자. 중요한 건 호미 질 몇 번으로 뽑아낼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은 인생에도 김매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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