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겨울방학
우리의 요리들, 그리고 코끼리
나로서는 가장 특별한 겨울 방학이었다. 그녀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던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아침에 그녀를 회사에 데려다주고 퇴근할 때 데리러 가기도 하였다. 조수석에 앉아서 그녀는 상사가 요구한 자료를 준비하며 간단한 아침을 먹기도 했다.
홀로 집에 남겨진 나는 그녀 집의 살림을 스캔하였다. 공군 취사병으로 근무했던 나는 원체 선입선출, 재고관리에 민감하였다. 그 집에는 우리 집 살림에서는 보지 못한 신기한 식재료들이 많았다. 아보카도 오일, 푸실리, 쯔유간장, 굴소스, 냉동 칵테일새우, 갑오징어 등등. 그중 많은 것들이 유통기한을 지났거나 지나려고 하고 있었다. 이게 내가 못 보는 꼴이다.
그래서 처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못 먹을 정도의 식재료는 버리지만 대부분은 요리로 승화하였다. 그녀와 기존 재료를 활용해서 먹을 수 있는 각종 요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 전역한 공군 병장은 10여 년이 지나 다시금 요리 혼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음식들을 해먹었다.
주방의 지휘권은 대체적으로 나에게 있다. 하지만 그녀도 요리를 곧잘한다.
그녀와 식사를 하면서 바뀌어 가는 것은 쌀밥의 양이었다. 지금까지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음식은 일반적인 한식 식단이었고 나는 그중 김치찌개, 된장찌개, 카레 등으로 밥을 말아먹는 형태를 선호하였다. 그러다 보니 한번 먹는 밥의 양이 상당한 것에 더불어, 저런 음식들은 몇 시간이 지난 뒤 밤쯤에 슥 나와서 먹으면 숙성된 맛이 일품이기에 식사량이 도저히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체로 쌀밥은 적게 먹는 편이었다. 나중에 처갓집에서 식사를 해보니 밥을 적게 먹는 것이 이 집안의 특징이었다. 이 패턴이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탄수화물 적게 먹으면 좋지 뭐'라는 생각으로 나도 점차 쌀밥 소비량을 줄여나갔다. 그래서 가끔 우리 집에 가서 식사를 하면 어머니가 퍼주시는 공깃밥의 양이 어색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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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실장직을 매우 힘들어했다. 본인 스스로 칭하길 보조로서, 부하로서 최고의 사람이란다. 누구에게 명령 내리는 것을 괴로워하였으며 아랫사람이 지시에 잘 따르지 않으면 그 책임을 스스로 다 커버하는 스타일이었다. 실장직을 하면 할수록 그녀 마음의 병은 깊어지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어플에서 처음 대화한 날도 10시까지 야근한 후에 열받아서 홧김에 설치한 것이었다고.
출근하기 싫어서 널부러진 그녀
거기에 실장으로서 실원들에게 연말에 고가를 주는데 그 과정 중 실수 아닌 실수로 누군가에게 불이익이 발생했다고 하였다. 그녀는 그로 인해 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 그녀를 보며 글을 한편 써서 보내주었다. 그녀는 처음 받아본 독특한 선물이라며 묘한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여자와 코끼리
여자는 누워있다. 코끼리를 껴안고 누워있다. 조카에게 사준 코끼리 인형. 조카의 편안한 잠자리를 바라며 선물하였지만 자신의 잠자리가 더 소중함을 깨닫고 한 마리 더 구매한 코끼리. 지금 껴안고 있는 것은 조카의 코끼리다. 여자는 지난 이틀을 생각한다. 호사다마라고 했다. 나쁜 일은 왜 이리 눈치가 없는 것인가? 좀 먼저 오거나 좀 늦게 와도 되잖아? 왜 눈치 없이 껴들어 오는 거야.
여자는 승진을 하였다. 근속을 채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승진이 아니다. 지지난해 아무도 받지 못했던 A등급을 자신의 팀 3명이나 받게 했던 공로를 인정받은 그야말로 진짜 승진이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은 공교롭게도 3명의 A였다. 3명의 A는 4명의 A일 수 있었다. 이제 막 실장이 되면서 이뤄낸 승진은 누구보다 유능하였다고 인정받는 객관적인 지표였지만 더 잘할 수 있었다는 마음은 자신을 초보 실장으로 힐난할 보다 큰 이유였다.
자신의 탓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신의 팀원이 B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승진의 들뜬 마음을 가지고 그를 위로했던 자신이 민망했다. 엄밀히 그것은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그녀의 권한이었고 룰에 위배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 더 신경 쓸 수 있었다는 불편함은 여전히 가슴 한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에게 솔직히 자신의 권한적 부주의함을 설명하고 작게나마 마음을 떨쳐냈다.
그녀는 시간을 제단한다. 군인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은 시간을 제단하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서울 사람으로서의 기질은 계속해서 머릿속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했다. 이름있는 회사의 유능한 실장임에도 그녀는 좀처럼 주말에게 안락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작년 말부터 자신의 취미가 한껏 녹아있는 일을 하고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의 위치에서 힘껏 뛰고 있는 이들과 모여 서로의 에너지를 공유하며 자신을 채우는 시간을 가진다.
이번 주는 금토 일정이다. 어제 일과를 마치고 가족들과 소소히 치킨과 맥주로 승진을 축하하려던 여자는 그 맥주가 다른 것을 위함임을 알았다. 사람은 기쁠 때도 술을 들지만 속상할 때도 술을 든다는 것. 동생 부부 내외의 갈등으로 부모님은 마음이 좋지 않으셨고 맥주는 그 마음을 달래는 도구였다.
안고 있는 코끼리를 놓아주어야 할 시간이다. 이제 준비하고 모임에 가야할 시간이다. 내일 밤에 껴안고 잘 같은, 다른 코끼리를 생각하며.
침대 근처 바닥에서 굴러다녀 나는 먼지코끼리라고 구박하지만 그녀는 지금도 그 코끼리를 소중히 여긴다. 한번 빨래한 후에 관절이 녹은듯 힘아리가 없어졌다.
우리집에 한 마리, 처갓집에 한 마리, 총 2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