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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웨덴 시골집 Jan 14. 2022

당근은 이렇게 먹으면 무조건 꿀맛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맛 하나는 보장합니다


가을 한국행 여행에서 돌아와 스웨덴에 도착하자마자 폭설이 내렸다. 화창하고 따뜻한 한국의 가을에서 순백의 스웨덴의 겨울을 느끼기까지 단 하루가 걸렸다. 봄에 어설픈 솜씨로 만들어 놓았던 텃밭은 눈 속 깊이 파묻혔다.  텃밭에는 쌈 채소 두 종류와 당근, 고수를 심었었다. 쌈 채소는 다 따먹지도 못하고 당근은 몇 뿌리 수확한 게 전부인 채로 한국으로 향했기에 텃밭의 상태가 영 궁금한 게 아니었다. 눈은 그렇게 며칠을 더 펑펑 내렸고 마당에 쌓인 눈은 영하로 떨어진 날씨 탓에 꽤 오랫동안 녹지도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렇게 추운 날들을 여러 밤 보내고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자 마당의 눈도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눈도 내리고 서리도 내리고 땅은 얼었다 녹았다를 겨우내 반복했다.

‘추위에 다 얼어 죽었겠구먼’ 아쉬운 생각을 하며 텃밭 상태를 확인하러 걸음을 옮겼다. 얇은 잎의 쌈 채소들은 모두 얼어 시들시들 죽었을 거라 예상했건만 아직도 파란색을 띠며 살아있는 잎들이 보였다. 한여름에 쌈 채소를 따먹으면서도 잎이 조금은 억세다는 생각은 했지만 한겨울 추위를 이겨낼 정도로 두꺼운 잎의 채소가 아니라 놀랐다.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니 몇몇 잎은 얼었다 녹아 죽어있고 몇몇 잎은 뿌리로 이어지는 부분까지 상태가 양호했다. 꽃을 피우고 씨앗까지 맺었던 고수는 RIP.. 아직도 잎이 푸릇푸릇하고 쌩쌩해 보이는 당근의 상태도 확인해 봤다. 초가을까지만 해도 당근의 크기가 아주 작았기에 땅속에서 얼어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파란 잎사귀를 잡고 흔들어 뽑아보았더니 웬걸 잘 익은 주황색 당근이 얼지도 않고 잘 살아있다. 싱싱한 당근을 보는 게 반가우면서도 놀라운 마음에 바로 ‘겨울당근’이라 검색을 했더니, 당근 말고도 겨울을 잘 견디는 채소들이 꽤 있는듯했다. 텃밭이란 걸 가꿔본 적이 없으니 그 사실을 알았을 리가.


당근 수확


 

스웨덴의 혹독한 겨울에도 꼿꼿이 작은 잎을 세우고, 땅으로 뿌리내려 살아가는 이 식물들의 모습 앞에서 복잡한 감정들을 느꼈다. 이 여린 쌈 채소도 이렇게 추위를 견디고 있는데 스웨덴의 겨울은 춥고 어둡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나란 존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부끄럽고 겸허한, 자연에 대한 감탄이 뒤섞인 마음이었다. 자연이 위대한 이유는 아름다운 풍경과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상기시켜주기 때문이 아닐까. 광활한 자연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 보이는 순간을 모두가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며, 작디작은 식물들 앞에서도 경외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잦아지는듯하다. 씨앗에서부터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노라면 기특해 죽겠고 칭찬과 응원의 말을 힘껏 건네게 된다. 아마 지금보다 더 어렸던 나는 씨앗이 싹을 틔우는 모습을 매일매일 들여다볼 시간도 없었고, 관심사가 언제나 시끌벅적한 세상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료도 한번 주지 않았는데 당근들은 이렇게도 잘 자라주었다



뽑은 당근을 집안으로 가져와 흙을 씻어내고 한 입 크기로 잘라 맛을 보았다. 먹기 직전까지도 당근이 얼어있는데 색 하나 안 변한 건 아닌지 의심했다. 입으로 넣은 당근을 씹는 소리가 경쾌했다. 맛은 또 얼마나 달달한지! 씹기 전까지도 믿지 못했던 당근의 생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쨍하고 밝은 주황색의 당근은 해가 질 채비로 급히 어두워지는 오후 세시 반의 분위기를 밝혀주었다. 마트에서 산 당근을 먹으며 이리도 기뻐한 적은 없었다. 그런 당근은 썩어 버리면서도 아쉬운 마음 하나 들지 않았다. 돈이 좋다면서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기쁨을 알아가는 게 시골살이의 묘미인가 보다. 세상 가장 행복하게 당근을 먹는 방법? 봄이 오면 씨앗을 뿌리자.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는 당근을 맛볼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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