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6월, 한낮 기온이 20도에 채 다다르지 못하는 날이 많다. 18도만 돼도 참 좋을 텐데. 아직 여름의 초입이라 그렇다 쳐도 아직도 날씨가 이렇게 선선한 걸 보면 왠지 올여름엔 비가 많이 올 것 같다.
해가 길어지면서 마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5월에는 야채를 기르기 위해 작년보다 조금 더 그럴싸한 텃밭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씨앗들을 실내에서 발아해 심고 스웨덴 마트에서 산 씨앗들도 흙에 심었다. 깻잎 모종을 마당 텃밭으로 옮겨 심었더니 몇 그루는 토양과 기후가 급변해서 그런지 말라 죽고, 비실비실하던 몇 그루도 햇빛이 강해 타 죽으려나 싶었는데 잘 살아남았다. 깻잎 외에도 샐러드, 바질, 당근, 비트, 고수, 깻잎, 무 등을 심었다. 너무 많은 종류의 씨앗을 뿌려 어디에 무엇을 심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다. 새싹이 돋고 그럴 싸한 형색을 갖추기 전에 어디에 무얼 심었는지 모를 것이다..
얼마 전 만난 중국인 친구가 본인이 가꾸는 텃밭에서 벌써 야채를 수확해 먹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분명히 비슷한 시기에 파종한 것 같은데 고수, 샐러드, 무 등을 벌써 수확해 먹는다니, 사진 속 그녀의 유기농 야채 풍성한 접시를 보니 내 텃밭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친구는 아무래도 우리 집 텃밭에 비료를 줘야 할 것 같다면서 나를 마트로 끌고 가 어떤 비료를 사용하면 되는지 직접 보여주었다. 그날 바로 닭똥 비료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 야채들이 쑥쑥 잘 크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아 비료를 텃밭에 고르게 뿌려주었다. 비료를 주고 난 뒤 비가 왔고 그 후 채소들이 더 쑥쑥 잘 자라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는데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바질은 참 키우기 쉬운 허브인데 이상하게 텃밭에서 자라는 바질 상태가 영 이상했다. 씨앗이 이상한가? 불량 씨앗인가? 의심을 해봤다. 텃밭의 샐러드도 쑥쑥 자라기 시작하면서는 잎이 사라지고 갉아먹힌 흔적이 보였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언젠가 달팽이들이 텃밭으로 들어와 채소들을 갉아먹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몰랐지만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어제도 몇 마리의 달팽이를 텃밭 밖으로 퇴출시켰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텃밭으로 출근(?) 아닌 출근을 해 달팽이를 퇴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집에 하루 종일 있는 날에는 몇 시간에 한 번씩 텃밭을 점검한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텃밭으로 가보았다. 더 많은 달팽이들이 파티를 열고 있었다. 샐러드를 얼마나 갉아먹었던지! 큰 놈 작은놈 찾아내며 궁시렁궁시렁 내 야채를 먹지 말란 잔소리를 하며 텃밭 밖으로 집어던졌다. 꽤 힘차게 던진 것 같은데 텃밭 옆의 나뭇잎에 걸려 바로 앞으로 툭하고 떨어지더라.
달팽이 여러 마리를 퇴출하고 가장 최근에 씨앗을 뿌린 텃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상하게 텃밭 중심부에 흙이 잔뜩 쌓여있었다. 내가 이렇게 흙을 쌓아 놓고 씨앗을 심지 않았을 텐데.. 바람이 많이 불었나.. 의아해하며 쓱쓱- 두둑이 쌓인 흙을 나뭇가지로 흩어주었다. 한참 흙을 고르고 있는데 흙무더미 안으로 기다랗고 물컹물컹한 물체가 보였다. 세상에 이렇게 커다란 민달팽이라니! 모양새가 너무 기괴해 비명을 지르고 냅따 집안으로 도망을 쳤다. 주말 아침 늦잠을 자는 동거인을 흔들어 깨워 텃밭에 이상한 물체가 있으니 함께 확인을 해보자고 했다.
비몽사몽 텃밭으로 다가간 동거인은 땅으로 허리를 숙이고 자세히 살피더니 아무런 감흥 없이 이건 고양이 똥이라고 말하며 나뭇가지로 짚어채 텃밭 밖으로 집어던졌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엔 이웃집 고양이가 자주 놀러 온다. 마당을 어슬렁 거리거나 바위에 앉아 일광욕을 쬐다가 사라지곤 하는데 아마 고양이 입장에서 텃밭이 꼭 배변판 같이 보였나 보다. 연한 갈색의 기다란 그것이 꼭 민달팽이의 색과 비슷해 내 입장에서는 대왕 민달팽이나 작은 뱀인 줄 알고 놀란 것이다.
차라리 고양이 똥이라니 마음이 놓였다. 고양이가 자근자근 작은 발로 꽤 열심히 흙을 파헤쳐놔서 파종했던 씨앗들은 아마도 새싹을 틔우지 못할 것 같다. 게다가 어디에 무엇을 심어놨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무슨 야채가 나오고 안 나올지 감이 오질 않는다. 무슨 씨앗을 어디에 뿌렸는지 메모라도 해놓을걸 그랬다. 역시 텃밭을 가꾸는 사람은 부지런해야 하나보다. 오늘도 이렇게 땅으로부터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