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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나 Jan 23. 2024

어머니 생신상에 음식과 함께 올린 것

11년 차 며느리의 고백

 어머니의 생신날이다. 시금치, 시냇물, 시나리오, 시나브로. 11년 차 며느리지만 '시' 자로 시작하는 단어만 들어도 아직은 그리 편하지 않다. 누가 멱살을 잡지도, 괴롭히지도 않는데 괜히 그렇다. 소소하고 잔잔한 감정의 찌꺼기가 있어 그런 건가.  cool하다 생각했는데, 나 좀 warm한 사람인건지. 나조차 감정의 근원을 모르겠다.


 첫인상 때문이라는 게 가장 유력하다. 남편(당시의 애인)의 부모님을 처음 뵙던 날, 어머니의 그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좋은 티도, 싫은 티도 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겠노라 의지가 엿보이던 입술. 그리고 아버님의 온화한 미소. 아버님은 웃으시며 내게 첫 악수를 건네셨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 해사한 미소로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그래, 우리는 이선생에 대해 잘 모르니 지금부터 약 10분 정도의 시간 동안 태어나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브리핑하듯이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브. 리. 핑?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나 밥 먹으러 왔는데. 여기 지금 혹시 면접 시험장?'


 멘탈이 광탈당했지만, 또 내가 누군가. 그냥 했다. 막힘없이 술술. 사실 뭐라고 했는지 알맹이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싫다고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닐뿐더러 도망갈 구멍도 없었다. 상향 15도쯤 허공을 응시하다 (예비) 시부모님의 얼굴을 흘긋 보다를 반복하며 브리핑을 날렸다. 그래, 입담으로 월급 받으며 사는 내가 10분쯤 이야기 못 하겠나.


 체감상으로는 영겁과 같은 시간이었다. 한 바닥의 브리핑이 지나가고 음식이 나왔다. 아버님 어머님은 말없이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신 뒤에 내 지나온 삶의 과정에 공감과 격려를 건네셨다. 편하게 밥을 먹으라는데 누가 면접장에서 마음 편히 밥을 먹나.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이 일은 시댁 특유의 분위기를 아주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그래서인지 내 기억에도 선명히 남았다.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신 아버님과 초등 교사를 하시다 명예 퇴직하신 어머님. 그 아래 온순하고 순한 외아들. 그렇게 나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시부모님은 우리가 결혼을 하자, 아들 하나뿐이던 집에 딸이 하나 생겼다며 좋아하셨다. 매주 주말이면 함께할 스케줄을 잡으셨고, 우리가 방문하지 못하는 주말에는 서운함을 보이셨다. 퇴직하신 아버님,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며 온 열정을 불사르던 어머니. 딱히 바깥활동에 취미가 없으신 두 분이 넓은 집에 덩그러니 재미없이 남으신 거다. 신혼 때부터 우리를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셨다. 주말마다 시댁을 가야 하는 스케줄이 상당히 힘들었다. 개인적 시간이 중요한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결혼하고 두 달 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어머니의 생신. 사실 새댁이 무슨 요리를 할 줄 알겠나. 새댁의 열정과 친정 엄마의 서포트로 신혼집에 첫 생신상을 차렸다. 내 솜씨로 절대 할 수 없는 갈비찜에, 잡채에.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차린 상이 아니다. 시부모님도 눈치채셨을지도. 식구가 많지 않아 요리를 다양하게 차리지 않는데도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었다. 사실 첫 해는 엄마 우렁각시가 상을 차려 주고 도망친 결과물이었다. 어머님은 연신 행복해하셨다. 그래, 첫 생신은 잘 대접했어. 한 번은 해야지. 잘했어. 스스로를 토닥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알지 못한 채.

몇 년 전 언젠가, 어머니 생신상

 그날이 너무나 좋은 기억이었던 어머니는 집에서 생신 식사를 하기를 원하셨다. 식당에 가서 생일파티를 하는 것은 서글프고 불편하다셨다. 뭐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게 좋은 거라고 엄마에게 칼같이 교육받고 자란 나였다. 내 가치관에서 크게 어긋나는 일이라 힘들었다. 몸보다 마음이. 재료비에 장을 보는 시간, 음식 하는 시간과 노동력. 모든 것이 외식보다 비효율, 비합리였다. 하지만 이 문제로 신랑과 더이상 갈등하고 싶지 않았기에 집에서 하는 생신상을 택했다. 나 하나만 생각을 고쳐 먹으면 모두가 행복한 날이었다.


 처음에는 생신상을 멋들어지게 차리려고 검색을 하고, 안 하던 새로운 요리를 찾고 연습도 한두 번 해본 뒤에 생신상을 차렸다. 그러다 보니 생신이 한 번 지나가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행복할 리 없었다. 다 차려진 식탁을 짠! 하고 보여드리고픈 마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새댁의 패기, 지나친 완벽주의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보니 이건 오래가지 못하겠다. 내가 행복하게 준비를 해야 생신상에 오복이 깃들지 않겠나.

3년 전, 어머님 생신날

 음식의 가짓수를 좀 줄이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메인 요리 한 두 가지 정도만 준비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꿨다. 상이 너무 간소한가 싶었는데 어머니는 더 좋아하셨다. 며느리가 탈진한 상태에서 받는 생신상이 편하실리 없겠지.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 건지, 노선을 바꿔 그런 건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올해 생신에서는 아직 어린 둘째가 식사를 하다 말고 자리를 떠나 장난을 치려했다. 하지만 집이라 초조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사실, 시부모님이 원하신 건 멋들어진 요리가 아니라 이런 분위기였겠다. 시댁에 자주 가지만 우리 집에는 거의 오지 않으시는 시부모님께서 아들네 집에 일 년에 두어 번 와서 둘러보시는 날. 거창하게 대접해야 하는 날이라 생각하면 내 마음부터가 벌써 지옥이 되기에, 이번에도 내 마음 편한 쪽으로 결론을 내기로 한다.


 " 여긴 내 주방이니 너는 들어오지 마."

 " 설거지할 것도 없다. 얼른얼른 짐 싸서 이제 가서 쉬어라."

 " 뜨끈한 돌침대에 좀 누워서 한숨 자."

 " 이거(신사임당 언니) 갖고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어라."

 

 그러고 보니 시댁에 가면 어머니가 내게 가장 자주 하시는 말씀이다. 얼마 전에는 주말에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신랑과 아이들만 시댁에 보낸 적이 있었다.

"가서 밥 먹고 놀다가 와."

 그랬더니 어머니는 내게 먹이지 못한 수육이 아쉬워, 도시락처럼 1인분을 싸서 보내주신다. 쌈장에 마늘까지 여물게 담아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살짝 뭉클했던 건 비밀이다.

 

 집에서 생신상을 차린다 하면 친구들이 말한다.

" 말도 안 된다. 식당에서 밥 먹고 오면 되지 너 뭐 하는 짓이니!! 시댁살이 하니 너! "

 그러면 나도 그저 껄껄 같이 웃고 넘겨버린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아버님 어머님을 위해 차리는 밥상은 일 년에 딱 두어 번 정도. 매번 시댁에 가서 밥만 홀랑 얻어먹고 오는 며느리임을 생각하면, 보답의 기회로는 많지 않은 횟수다.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서시는 어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어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항상 농담과 장난이 생활인 내가 이번에도 장난스레 돌발 포옹을 했다. 살짝 놀라시더니 하하 웃으며 등을 토닥토닥하신다.


어머니, 고백합니다.

사실 이번 생신상에는 음식 말고 다른 것도 좀 올렸습니다.

고마웠던 마음, 원망했던 죄송한 마음, 외며느리의 사랑까지 함께 상에 올렸어요.


앞으로도 생신상을 오래오래 차리기를 바라며, 올해 시어머니 생신상 미션, 며느리가 클리어했습니다!


(대문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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