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슬하고 포근했던
감자를 샤악- 샤악- 긁어 껍질을 깐다. 하나를 뚝딱 까고, 둘, 셋, 넷 아기 주먹만 한 알감자를 스테인리스 양동이에 퐁당퐁당 담는다. 부엌 문지방에 쪼그려 앉은 5살 꼬마와 할머니였다.
“할머니! 어뜨케 그래 감자를 잘 깎아요?”
“아이고 마, 내가 한평생 해 온 게 이긴데(이건데), 몬하믄 우야긋노?”
“나도 할머니 나이가 되면 이렇게 할 수 있어요?”
“하모, 할 수 있제. 더 잘 하제.”
“맛있겠다! 얼른 삶아주세요”
아폴로, 꾀돌이, 반지사탕, 달고나를 사랑한 간식 꼬마 이효나였지만 그런 내가 가장 사랑한 건 삶은 감자였다. 아니, 감자를 삶는 할머니였다.
언니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고, 내가 말문이 트이기 시작할 때쯤, 아빠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재난이었다. 엄마는 추억의 장소를 떠나 대구에 아비새가 없는 둥지를 새로 틀었다. 엄마는 바빴고, 나는 너무 어렸다. 지금처럼 보육시설이 다양했을 리 없다. 막막했던 그때, 기적처럼 나의 손을 잡아준 것이 바로 감자 할머니였다. 엄마의 큰 이모. 내겐 이모할머니였다.
아침이 되면 우리 집에 와 해가 질 때까지 어린 나를 돌봐주셨다. 부지런히 만드셨을 멸치 반찬과 몇 알의 감자와 양파 등을 들고 와 어미새 대신 내게 모이를 주는 할미새였다. 내 또래의 친구들은 유년기 간식이라 하면 달콤한 알사탕이나 새콤달콤, 짝꿍 같은 과자를 떠올리겠지만 나의 뇌리에는 삶은 감자가 1번이다.
할머니는 감자를 물에 자박하게 담가 삶았는데, 소금인지 설탕인지를 한 꼬집 넣으셨다. 적당히 감자가 익었다 싶었을 때 냄비를 두 손으로 잡고 원수 머리채 흔들 듯이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면 맨들하던 감자의 표면이 거친 풍파를 만난 듯 포슬해진다. 폭닥해진 그 감자의 얼굴에 설탕을 솔솔 뿌려 한 입을 넣으면 꿀맛, 천상의 맛이었다. 엄마는 설탕 대신 소금을 찍어 먹으라는데, 할머니께 눈빛을 찡끗! 하면 소금인 듯, 설탕을 스윽 발라 주셨다. 역시 할머니와 나는 환상의 짝이었다.
자주 아팠던 언니에게 엄마를 양보하고, 병원에 입원한 언니에게 엄마를 내어줘야 했을 때도 할머니는 내 옆에서 그네를 밀어주고, 안아주고 업어주며 착하다, 곱다 해주셨다. 5살 즈음이었나. 언니가 큰 수술을 하게 되어 대학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엄마는 간병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는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부르며 울었다고 한다.
“효나야, 500원 주꾸마.(줄게) 이거 챙기서(챙겨서) 까까 사러 가자. 으이?”
“싫어! 돈 필요 없어! 엄마랑 잘 거야! 으아앙!!”
어린 나는 울음을 놓았단다. 우는 나를 달랠 방법이 없어 무작정 업은 채 이곳저곳을 걷고, 동요도 불경도 아닌 멜로디를 흥얼거리셨다. 모든 장면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음성이, 할머니 등에서 나던 살냄새가 내 몸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 같다. 친손주도 아닌 조카 손주를 어쩜 그토록 사랑해 줄 수 있었을까. 사랑에 측은함이 버무려진 감정이었을 거라 짐작만 할 뿐이다.
할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나의 하루가 잘 돌아갈 때쯤 부터 더 이상 우리 집에서 감자 삶는 냄새가 나지 않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나의 둥지였고, 품이었던 할머니는 그렇게 내 삶의 뒤안이 되었다. 역시 사랑은 물처럼 아래로 흐르는지, 당연한 사랑인 줄 알았고 금세 잊었다.
할머니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영정사진을 바라본 날, 펑펑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가슴속 아주 깊은 슬픔이 밀물 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아기를 업어줄 때, 안아줄 때, 감자를 깎고 있을 때 할머니를 떠올린다. 어느 봄날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었던 그즈음의 하늘을 볼 때면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할머니의 포슬한 감자를 먹고, 달콤한 사랑을 먹고 제가 자랐습니다. 저도 그 사랑을, 그 포근함을 제 아이들에게 전해주며 살아갈게요. 감사합니다. 나의 감자할머니.’
- 맛세이에 할머니의 감자를 꼭 넣고 싶었습니다.
예전 발행했던 글 ‘가장 슬픈 별’ 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봐주시면 매우 감자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