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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엄공 Dec 23. 2021

워킹맘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달픈 이 삶도 기꺼이 버티는 이유 1

"성훈이한테 처음 엄공씨에 대해 전해 들었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생활력이 강한 여자'라는 거였어요."


오전 내내 세차게 내리던 여름 장마의 굵은 빗줄기가 차차 잦아들었다. 비구름이 걷히자 쨍하게 떠오른 한낮의 태양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에 땅은 지글지글 타올랐지만 공기는 아직 한껏 물기를 머금은, 매우 끈적끈적하고 후덥지근한 7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처음 만난 소개팅 자리에서 주선자가 소개한 나에 대해 가장 호감을 느낀 부분이 '강한 생활력'이라는 소개팅 남(=현 남편)의 말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켜진 쾌적한 카페에 도착해 기분 좋게 홀짝- 막 들이킨 달달한 아이스 바닐라라떼 한 모금을 그대로 소개팅남의 얼굴에 분사할 뻔했다.


"예??? ㅡㅡ "


"아, 성훈이가 그러더라고요. 같이 중국서 교환학생 하면서 1년간 지낸 친한 동생인데, 수능 치고부터는 줄곧 알바해서 직접 용돈도 벌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교환학생 생활하면서도 굉장히 알뜰하게 생활했다고."


이 사람과 오늘 이후로 다시 보게 될는지 아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양쪽 다 결혼을 생각할 만한 나이였던지라 이왕 저쪽에서 먼저 말이 나온 김에 나는 상대의 의중을 물어보고 싶었다. 미래의 아내가 함께 맞벌이하기를 원하는지, 전업주부가 되어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직접 양육해주기를 바라는지.


"아... 네... 뭐..... 틀린 말은 아닌데... 저에 대해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니. 결혼하면 같이 맞벌이할 여자를 원하시나 봐요? 말씀하신 대로 제가 또래보다 생활력이 좀 강한 건 사실입니다만, 저는 가급적 아이 낳으면 직장은 그만두고 싶거든요. 제 아이는 제가 직접 키우고 싶어서요."


이번에는 소개팅 남(=현 남편)이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아..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이후에도 사회생활을 지속하고 말고는 엄공씨 의지이지만, 저는 제 아내가 생활력이 강한 분이면, 맞벌이와 상관없이 앞으로 가계를 잘 맡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다는 뜻이었어요. 아이는 엄마가 키우면 좋죠.. 하하..."


나에 대해 너무도 솔직한 정보를 사전 제공한 주선자가 괜스레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한 아홉 살 즈음되었을 무렵부터였던가, 가끔 친구들은 '아빠는 회사로 출근한다'라는 말을 했지만, 나는 그 말이 우리 아빠에게는 맞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일용직 건설 노동자였던 우리 아빠는 날일을 하며 공사가 끝나면 이 현장 저 현장을 옮겨 다녔다. 매번 변하는 아빠의 일터에 따라 아빠의 목적지는 달라졌다. 현장과 집의 거리에 따라 보통은 4-5시, 어떤 때는 그 보다 훨씬 이른 새벽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밤중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회사'라는 특정 장소로 정시에 출근하는 직장인이 아니기에, 우리 아빠에게는 '(공사장에) 일하러 간다'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일하러 간 이른 새벽부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도 한참 지난 늦은 밤까지, 집에 있는 엄마라고 손을 놀린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세 자식들이 모두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야 집 근처 물수건 공장이나 김치공장에도 다니셨지만, 그전까지 엄마는 집에서 살림하고 세 아이들을 돌보면서 늘 그물도 짜고, 실밥도 따고, 빗자루도 메고 이런저런 부업을 계속하셨다.


남들보다 조금 못 배우고 덜 가져서 늘 고생스러운 삶을 사는 엄마 아빠를 볼 때면 나는 자식으로서 마음이 저리고 아플 뿐, 자라면서 우리 집이 가난해서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부끄러웠던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세상에 맞서고 묵묵하게 가정을 돌보며 자식들을 키우는 부모님께 늘 고맙고도 미안했다.




내 나이 열아홉, 수능이 끝나고 참 행복했다. 수능 끝나고 안 행복한 고3이 어디 있겠느냐 만은, 공부에만 전념할 고3 신분을 졸업하고 나도 이제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어서 정말로 기뻤다. 수능이 끝난 며칠 뒤 집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나의 첫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당시 최저시급이 3,100원이었는데 두 달 뒤 해가 바뀌면 곧 3,480원으로 오른다고 했다. 그때부터 쭉 내 용돈은 스스로 벌어서 썼다. 교재비, 교통비, 밥값은 물론이고, 첫 번째를 제외한 대학 등록금도 줄곧 장학금으로 벌었다.


비록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는 없지만 외국어 한 가지는 잘 익히고 싶어 교환학생은 꼭 해보고 싶었다. 지원 국가는 중국으로 정했다. '중국의 성장 잠재력을 꿰뚫어 본 혜안' 때문은 아니었고, 그저 내가 1년 정도 열심히 모으면 얼추 교환학생 경비를 스스로 모을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1년간 대학을 휴학하고 두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매월 70만 원씩 적금을 부어 차곡차곡 교환학생 1년 경비를 모았다. 어학원에 다니며 내는 버스비도 아까워 6킬로 정도 거리를 매일같이 걸어 다녔다.


교환학생이 되어 중국에 가서도 오롯이 내가 모아 간 한정된 금액 안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끝까지 마쳐야 했으니, 아무리 물가가 싼 중국에서라도 돈을 막 쓸 수는 없었다. 1원 단위로 그날의 지출과 잔액을 정리했고, 매 순간 아끼고 또 아껴야만 했다. 지금처럼 척척 커피 한잔 사 먹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고, 유학생들이 즐기던 그 흔한 발마사지 한번 받지 않았다. 돈도 돈이었지만, 평생 그 힘든 육체노동을 견디며 사셨던 우리 아빠 엄마도 누리지 못한 호사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함께 온 다른 아이들과 달랐던 나의 유학생활을 고스란히 옆에서 지켜본 소개팅 주선자인 선배는 당시 내 모습이 참으로 기특했던 모양이다. 아니, 그랬으면 당시에 쓰담쓰담 칭찬도 해주고 밥도 좀 사주고 할 것이지, 어쩌자고 8년이나 지나 소개팅을 주선하면서 소개팅남에게 '생활력이 강하다'를 나의 강점으로 들이밀었단 말인가. 참 웃픈 이 상황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50번 정도는 떨어져도 좋으니 '취업준비생'이 되어 이런저런 스펙 쌓으며 대기업 취업을 노려보고 싶기도 했고, 고시원에 들어가 몇 년간 속세와 단절한 채 공무원 시험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당장 내가 쓸 돈을 스스로 벌지 않고 무언가에 전념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에 졸업도 하기 전 적당한 규모의 중소기업에 취업하게 되었다.


남편과 소개팅을 한 때는 수능 이후 줄곧 지속한 아르바이트 생활이 4년, 직장생활이 5년이었으니 씩씩하게 견뎌야 냈지만 9년을 지속한 사회생활이 참 지겹고 피곤했다. 소리 없는 전쟁터와 같은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로 옆자리 동료와도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고, 더욱이 여자로서 사회생활을 지속할 때는 '일적인 술자리' 따위에서 무시로 여기저기 남의 몸 어딘가를 쓸어대는 나쁜 손으로부터 내 몸도 마음도 지켜야 했으므로 정말 한시도 경계태세를 낮출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기생하고 싶었느냐' 누군가는 나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결혼 후까지 이 지긋지긋한 사회생활을 쭉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고 싶었다. 남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여태껏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온실 속 화초가 되어 세상의 때라고는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하고 나긋나긋한 내가 되어 퇴근한 남편을 위해 잔잔한 꽃무늬가 그려진 앞치마를 입고 보글보글 맛난 된장찌개를 끓여내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는 꿈을 꾸고는 했다. 물론 아이를 갖기 전에는 어느 정도 맞벌이를 해도 좋지만, 임신을 하거나 출산을 해서 까지는 정말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와의 정서교감은 탯속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우선 임신을 하게 되면 정성껏 태교를 하고 싶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영유아기 안정된 애착 형성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아이의 유년기에 아이와 함께 더 많은 추억을 쌓고 싶었다. 아이가 자라 학교라도 가면 엄마가 아이를 직접 보살펴야 하는 이유는 무수히도 많았다. 무엇보다 '엄마가 일하는 집 아이'는 어떤 면에서든 좀 티가 난다는 부정적인 생각도 꽤 있었던 터라, 나는 절대로 워킹맘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남다른 생활력에 반한 그 소개팅남과의 결혼은 빠르게 추진되었다. 결혼을 앞두고 나는 그간 몇몇 썸남&구 남친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처분하기 위해 내 방 서랍 안 고이고이 모아놓은 편지 꾸러미를 꺼냈다. 이대로 버리면 다시는 열어볼 수 없는 나의 지난 풋사랑들에 대한 추억을 하나하나 펼쳐보며 곱씹던 중, 하얀 편지 봉투에 우표가 붙은 한 20년 정도 묵은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그 편지를 아직 내가 보관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봉투만 보고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발신인은 9살의 나였다. 수신인은 엄마와 아빠. 내가 초등학생 때에는 매년 어버이날이 되면 수업시간에 부모님께 편지를 써서 집으로 부쳤다. 하굣길에 직접 쓴 편지가 우편함에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그 편지를 부모님께 전달하지 않고 몰래 따로 챙겨놓았다. 학창 시절 지리 과목 '양'을 받았을 때도 성적표 한번 숨긴 적 없던 내가 스스로 부모님께 쓴 편지를 숨긴 당시의 기분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어릴 적 나는 간간히 '엄마 아빠! 나는 커도 절대 결혼 안 하고 엄마 아빠랑 살 거야. 언니랑 동생이랑 시집 장가가도 나는 안 갈 거니까, 늙어도 꼭 나랑 살자?'라는 말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홉 살의 어린 나로서도 왠지 또박또박 적은 글로써 매일 보는 아빠 엄마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는 것이 굉장히 낯부끄럽고 쑥스러웠다. 20년 만에 펼쳐 본 그 편지의 내용은 내 기억 속에 남은 그대로였다.


아빠 엄마, 저를 낳아주시고
항상 저희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고
저희들을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해요.
이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꼭 아빠 엄마 호강시켜 드릴게요.
사랑해요!


거실에 계시던 엄마에게 20년 전 부끄러워 차마 전하지 못했던 그 편지를 보여드렸다. 엄마는 '아이고 이게 언제 쓴 거야. 이런 게 있었어?' 하며 그저 웃으며 넘기셨다.




'달콤한 몇 년간의 신혼생활'에 대한 결의가 무색하게도 나는 결혼 후 한 달 만에 큰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주말부부이면서 임산부의 몸으로  지속하는 사회생활은 몸도 마음도 정말로 고달팠다.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첫 소개팅 자리에서 남편에게 당당히 선언했던 대로 선뜻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물론 누구 하나 나에게 일을 계속하라고 강요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나는 20년 간 내 서랍 속에서 오래오래 묵히고 숙성된 저 짤막한 편지 속 부모님을 향한 내 오랜 진심을 스스로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남산만큼 부른 배로 출근했다. 첫째는 출산 3일 전, 둘째는 출산 5일 전까지.


지금의 나와 같이 젊고 건강했던 당시 30대의 내 부모님은 어느새 늙고 힘없는 60대의 중년이 되어있었다. 부모님은 평생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지만 가까스로 세 자식을 반듯하게 키워냈다는 자부심만을 가진 채 당신들의 노후는 미처 대비하지 못하셨다. 부업으로 평생 꼬부리고 앉아 지낸 엄마는 고관절 수술 후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얻으셨고, 내가 남편을 만난 그 해 여름 무더위에 공사판에서 추락해 구사일생으로 살아 난 아빠 역시 장애를 얻으셨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으셨다. 세 남매가 있지만 언니도 주말부부를 막 청산해 홀로 어린 조카를 돌보기 위해 간호사를 그만두고 전업맘이 되었고, 남동생은 수재들만 간다는 명문대학 피아노과에 '노력'만으로 입학했지만 앞으로 갈 길이 먼 상황이라 우리 집에 돈을 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출산 후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복직하면 적은 금액이나마 매달 고정으로 돈을 드릴 수 있었다. 나는 기꺼이 워킹맘이 되기를 선택했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지 않았던.


큰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 3개월을 마치고 복직한 첫날. 내 자리 위 달력은 여전히 아직 아이를 출산하던 9월이었다.

만삭의 배로 아이를 낳기 3일 전까지 출근을 했고, 3개월의 출산 휴가를 지내고 아이가 100일이 채 되기 전 복직을 했다. 두 아이를 낳으며 그렇게 두 번을 반복했다. 둘째 출산 후 주말부부가 되어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버티고 또 버텼다. '사회생활 더럽고 치사해서 도저히 못하겠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은데, 그때 딱 하나. 엄마 때문에 눈물이 주르륵 나기도 했다.


20년 전 내 다짐처럼 정말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돈 많이 버는 딸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억척스럽게 살면서 버티는 내 모습이 잡초 같아 서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평생 고생한 우리 아빠 엄마를 좀 편히 해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며 살아내어도 어릴 적 내 다짐처럼 영영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리지는 못할 테지만, 나는 기꺼이 내 힘이 닿는데 까지는 버텨보려 한다. 주체할 수 없는 땀방울이 비처럼 쏟아지는 무더위와 살갗을 찢어내는 세찬 겨울바람 속에도 어김없이 새벽이면 피곤한 몸을 일으켜 연장이 가득한 봇짐 가방 하나 오른쪽 어깨에 덜렁 둘러맨 채 묵묵히 일하러 나가시던 그 아빠의 뒷모습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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