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대성당, 내가 가장 사랑한(1) 11
폴란드 각 도시의 구시가 시작은 늘 바르바칸(BARBIKAN)이다. 폴란드 여행을 결심하고 각 도시에 대해 공부하기 전 동유럽 국가들을 한데 모아놓은 가이드북을 보면서, 염개미는 바르비칸이 어느 한 도시의 고유지명인 줄 알았다. 바르비칸은 성으로 들어서는 길목을 지키는 성문탑을 의미한다는 것을 여러 번의 반복학습 후 알게 되었다. 구시가로 들어서는 관문은 폴란드 여행 내내 늘 나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엄마, 우리나라에서 예매해 온 투어 바우처 더 이상 없는거지?"
"없어."
"그럼 오늘은 구시가에서 뭐 해?"
"뭐하냐니요, 딸내미. 구시가에 할 게 얼마나 많게요. 박물관이며 성당이며 진진한 데가 크라쿠프 구시간데."
"성당 또 가게? 또 스테인드글라스하고 천장 패턴 찍어달라고 할거지? 나 목 아프고 허리 아픈데."
"퐁첵 두 개 사줄게."
"세 개!"
"아잇, 나쁜 놈, 콜!"
'무계획이 계획인 날'을 보낼 수 없는 계획형 여행자 염개미의 하루는 연짱이에게는 '투어 노동'을 의미하지만, 엄마가 그런 엄마인 걸 어쩌겠니, 연짱이. 퐁첵 세 개 먹었으면 네 개 분량의 열량을 태워야 혈관 짱짱하고 여드름 덜 올라온다, 하는 뒷말을 삼키는 엄마였다.
구시가의 시작 바르비칸. 구시가를 둘러싼 성벽과 붙어 있는 탑이자 망루이자 관문.
낮은 기온 때문에 밤새 내린 빗물이 얼어붙은데다 바람까지 세게 불어 얼굴이 얼얼할 정도로 날이 추웠다. 하지만 명징한 하늘 아래 마음이 파랗게 부풀어 종일 걷고 또 걸어도 좋았다.
원래는 성벽에 그림을 걸어놓고 파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데, 겨울 비수기이기도 하고 날이 유독 춥기도 했고. 2층은 커피숍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올라가는 돌계단을 철문으로 계단을 아예 막아놓은 것을 보면 그것 역시도 성수기에만 운영하는가 싶었다.
구시가광장 중심을 지키고 선 마리아 바실리카 대성당부터 돌아보기로 하였다. 마리아 대성당은 13세기 후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기 시작하여 수 세기 동안 숱한 재건축을 거쳤다. 1477년에서 1489년 제단이 마련되었는데, 이 제단은 후기 고딕 걸작으로 여겨진다고. 18세기에 들어서서는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고 19세기 후반 광범위한 복원을 시작하였다. 둥근 천장은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본땄고, 벽은 가문들의 문장이 있는 그림, 성모 마리아의 기도문,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는 깃발을 들고 있는 천사들로 가득하다. 특히 이 성당의 제단은 세 종류의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구조는 단단한 참나무로, 배경은 가벼운 낙엽송으로, 인물들은 부드럽고 유연한 보리수나무로 조각되었다고. 제단장식대는 예수님의 조상인 다윗왕의 아버지 '이새의 나무'를 나타내었으며, 안쪽에는 사도들에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의 영면이 조각되어 있다. 제단장식 양 쪽 끝의 부조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삶을 보여준다고.
안타깝게도 염개미와 연짱이가 방문하였을 때 제단장식은 전면 보수 중이었다. 유럽에서도 가장 훌륭한 후기 고딕 걸작 중 하나로 손꼽는다는데, 2021년이나 되어야 보수가 끝난다고. 아무리 비수기라도 그렇지 너무들 하오.
이른 아침이든 해질 녘이든 앞에서든 뒤에서든 어디에서 봐도 멋진 마리아 바실리카 대성당(ST MARY'S BASILICA CATHEDRAL).
마리아 대성당은 높이와 건축 양식이 약간 다른 두 개의 탑이 있다. 좀 더 높이가 높은 왼쪽 탑인 '북쪽 탑'은 82M 높이로 'BUGLE CALL TOWER' 또는 'EXCUBIARUM WATCHER TOWER' 로 불리며 매 시간 54m 높이에서 '성 마리아 성당의 소집나팔 소리(ST MARY'S BUGLE CALL)' 가 재생된다. 정말 정시에 녹음된 나팔소리가 들린다. 더 낮은 '남쪽 탑'은 69M 높이이고, 교회 종을 보관하여 종탑 역할을 한다. 두 탑 모두 '큐폴라' 지붕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높은 쪽 탑은 1478년의 고딕 큐폴라 지붕 장식이고, 낮은 쪽 탑은 1592년에 제작된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큐폴라 지붕 장식으로 되어 있다. 저런 지붕 장식을 '큐폴라(CUPOLA)' 라고 하는구나!
이 두 탑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요. 탑을 짓기 위해 크라쿠프 최고의 건축업자로 알려진 두 형제가 고용되었어요. 형은 남쪽 탑(좀 더 낮은 탑)을 짓고, 동생은 북쪽 탑(좀 더 높은 탑)을 지어야 했지요.처음에는 공사가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속도도 비슷했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이 짓고 있는 남쪽 탑이 동생의 북쪽 탑보다 더 높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질투심에 불 탄 동생은 형을 죽이고 미완성 된 남쪽 탑에 큐폴라로 지붕을 씌우라고 명령했어요. 그리고 계획에 따라 지금은 더 높은 북쪽 탑을 완성했지만, 동생은 죄책감에 사로잡혔어요. 봉헌 당일 동생은 형을 죽일 때 사용한 칼을 들고 탑 꼭대기로 올라갔어요. 그리고는 공개적으로 살인을 자백하고 탑에서 뛰어내렸어요. 전설의 다른 버전에서는 형을 살해한 후 동생은 무서운 나머지 균형을 잃고 발판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그 전에 남쪽 탑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요.
"뭐야, 이 아름다운 성당에 무슨 전설이 이렇게 살벌하고 무서워."
"뭐 그런 전설이 있기는 해, 하고 워킹 투어 아저씨가 말해줬잖아, 엄마."
소집나팔소리에 얽힌 또 다른 전설도 있어요. 중세 시대 도시의 망루 역할을 했던 더 높은 북쪽 탑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요. 크라쿠프의 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알리는 거예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재 발생이나 적의 공격을 알리는 것이지요. 그 나팔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는 거예요. 전설에 따르면, 마리아 대성당의 탑에는 주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보초가 있었어요. 12세기 폴란드가 타타르 족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는 들어오는 타타르 족을 발견하고는 의심하지 않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나팔을 불기 시작했어요. 나팔을 불고 있을 때, 타타르인의 화살이 그의 목을 관통하였어요. 오늘날 소집나팔소리는 영웅적인 나팔수를 기리며 똑같은 순간에 뚝, 끊겨요. 나팔수 덕분에 크라쿠프는 침략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었으니까요.
"이곳 전설은 중간이 없구나. 무섭거나 슬프거나."
슬프게도 이 아름다운 대성당은 제 2차 세계대전 중 상당한 손상을 입었고, 예술작품 일부는 현재까지도 되찾지 못하였다고. 왜 안 그렇겠나. 자그마치 세계대전이고, 독일 옆에 붙어 있는 폴란드가 제일 먼저 침공당하였으니. 대성당 제단을 나치에게 안 뺏기려고 2차대전이 발발한 직후 열심히 숨겼지만, 집중적인 조사 -- 말이 조사지 아주 죽도록 고문했겠지 -- 끝에 결국 나치에게 빼앗겼다가 전쟁 후 1946년 크라쿠프로 반환되었고, 다시 1957년 대성당으로 되돌려졌다고. 그 외 회화작품, 제단, 금박 유물 등 다수는 반환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유물 대부분 역시 여전히 일본이 갖고 있고, 프랑스나 영국이 갖고 있는 건 통사정해서 빌려왔다가 다시 돌려주고 그러는데. 엄연히 내 것인데도 못 돌려받고 오히려 훔쳐간 것들이 더 큰 소리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마리아 바실리카 대성당은 계단을 올라가 크라쿠프 구시가 전체를 조망하는 탑 같은 것은 없었지만, 성당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루마니아 브라쇼브의 '검은교회(BLACK CHURCH)'는 아름다웠지만 차갑고 황량하고 어수선했었는데, 마리아 대성당은 어쩐지 따뜻하고 안온하고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이 때 염개미는 폴란드에 완전히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는 '폴란드'라는 나라와 '루마니아'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애정이나 정서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라 단정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두 국가의 경제력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브라쇼브는 크라쿠프에 비해 경제적인 면에서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구나. 교회 내부를 어수선하지 않게 복원하고 관광객들을 위해 최소한의 난방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사적(HISTORICAL MONUMENT)' 이라는 타이틀 아래 원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복원 혹은 보수하는
것과 예전 모습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여행한 폴란드 도시들마다 오래된 성당이나 유적은 꼭꼭돌아보았고, 복원과 유지가 꽤 잘 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내가 느낀 바는 폴란드는 국민들이 혹은 정부가 냉전체제 이후 국가 경영 자체에 애정을 갖고 있으며 -- 국가 경영에 대한 애정에는 정치, 경제적 투명성에 대한 관심도 포함된다고 나는 믿는다 -- 그러한 애정이 큰 전쟁 이후 이루어진 복구나 냉전 이후 국가 경제력 면에서 빛을 발하였나보다, 하는 것이었다. 동유럽이라고는 폴란드 외 루마니아 밖에 가보지 않았지만, 폴란드는 교통편이나 거리구획, 전반적인 시스템들이 체계가 잘 잡혀 있고 정돈된 느낌인데다, 장유유서 같은 동양 사상 없이도 노인 공경 잘 하고, 사람들 분위기 밝고 건설적이고. 또한 가 본 도시들마다 사람들 사고방식이나 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자유로워 보여서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폐쇄적인 공산정권을 견뎠을까 싶기도 하였다. 그단스크를 침공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바르샤바로 밀고 들어왔을 때, 바르샤바 폴란드 사람들은 독일의 어마어마한 전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당시 폴란드에는 변변한 군대라는 것 자체가 없어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명약관화 알고 있었음에도 정말이지 죽기 살기로 저항하였다고 읽었다. 폴란드의 저항이 예상 외로 극렬하자, 독일은 아예 화염방사기로 도시를 태워버려서 바르샤바 2/3 가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그렇게 소실된 수도 바르샤바를 전쟁이 끝난 직후 시민들이 십시일반 걷은 성금으로 재건하여 지금의 바르샤바를 만든 것이라고. 첫 재건 당시 파괴되기 전 바르샤바 사진을 두고 그대로 진행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바르샤바 모습은 예전 바르샤바 모습과 거의 같다고 들었다. 그리고 바르샤바 재건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고. 도시의 2/3 가 붕괴된 상황에서 그리 빠른 시간에 예전 모습 거의 그대로 복구해내는 정도의 국민성이라면 폴란드의 미래는 타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 밝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한민족의 극성맞은 근면성실함과 일맥상통하는 데 많은 폴란드를 사랑한다.
마리아 대성당 내부 관람 시작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