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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a Mar 24. 2022

위빠사나는 어떻게 나를 변화시켰는가 (1)

무망감(無望感)

무망감(無望感)

희망이 없는, 혹은 그 어떤 희망도 바랄 수 없는 상태의 감정.


당시의 나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단어가 있을까?


나는 모든 방면에서 실패자였다. 적어도 스물일곱 살의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었다.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던 나는 만으로 열아홉의 나이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었지만 내게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처음 프랑스에 도착해서 기숙사에 짐을 풀고 시내로 나갔을 때의 그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어진 지 몇백 년이나 되었을까,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건물들 사이를 지나며 돌길 위를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내 인생의 새 챕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챕터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막을 내렸다. 아빠의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서 더 이상 프랑스 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화요일에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5일 뒤인 일요일에 모든 걸 정리해서 귀국했다. 심리학도를 꿈꾸며 새 시작의 설렘 속에서 살던 나는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졸지에 장기휴학생이자 유학 실패자가 되었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미처 추스르지도 못하고 현실에 적응하지도 못한 채 부유하는 나날들을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6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이미 남들보다 늦은 상태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을 때 나는 원하는 직종이 뚜렷했고 그에 대한 목표의식도 명확했다. 하지만 집안사정으로 최대한 빨리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하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하여 내가 원하던 분야와는 전혀 다른, 그전까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분야의 회사에 덜컥 입사하게 되었다. 객관적인 조건은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또래 친구들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반도체 후공정 작업에 들어가는 부품을 설계·제조하는 회사였고 업계 1위의 역사를 지닌 건실한 중견기업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해외영업팀 소속이었다. 연봉도 나의 능력치에 비해 높은 편이었고 여러모로 나에게 과분한 회사였다. 그러나 그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점차 병들어가고 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회사의 악조건으로는 과도한 업무, 잦은 야근, 박봉, 동료들과의 불화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사항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모순적이게도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속으로 곪아가던 이유는 내 근무 환경이 위 조건들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에서 무용(無用)한 존재였고, 회사 내에서 나의 역할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회사의 핵심인력으로 키워주겠다며 나를 직접 뽑으신 임원 분들은 내가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줄줄이 퇴사를 하셨다. 내가 속해있던 곳은 신규 사업 본부였는데, 설상가상으로 신기술 개발에 연이어 실패하면서 회사 내에서 우리 팀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나는 회사에서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 부서 내의 유일한 비전공자이자 엔지니어가 아닌 일반 사무직이었으며, 그 와중에 유일하게 어떤 업무도 배당받지 못한 잉여인력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해고가 아닌 자진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이면에는 팀원들의 따돌림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발 실적이 지지부진하게 되기 이전에는 팀원들 모두 하나같이 나를 아끼고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나와 함께 일하던 임원 분들이 퇴사하신 이후로 직속상사 하나 없이 덩그러니 남게 된 나를 다른 팀원들은 안쓰럽게 여겼고, 내가 할 수 있는 업무를 알려주거나 회사생활에 대한 다양한 조언을 건네는 등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본사에서 부서를 향한 압박이 가해지면서 부서의 존폐여부가 불투명해지자 이런 스트레스 상황에서 나는 미움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팀 내에서 ‘있을 이유가 없는’, ‘쓸모없는’ 구성원이었고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일 뿐이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내 인사에도 반응을 하지 않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식사시간에는 나 혼자 사무실에 남게 되었다.


당시 나는 송도지사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우리 회사가 위치한 산업단지는 차가 없이는 생활하기 어려울 정도로 외진 곳에 있었다. 나는 물론 차가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 팀원들이 점심시간에 나를 제외하고 다 같이 차로 이동하여 식사하러 나가는 걸 보면서 비로소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회사와 그나마 가장 가까이에 있는 모 대학의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매일 왕복 40분을 걸었다. 한 시간의 점심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걸어야 했는데, 송도의 차갑고 축축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바삐 걷던 그 11월의 나날들은 감히 잊기 어려운 씁쓸함만을 안겨 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 이전까지는 속 얘기도 나누며 꽤 가깝게 지냈던 한 선임님으로부터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니까 OO씨가 뒤에서 욕먹는 거예요.”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을 때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그렇게 스물여섯 살의 나는 상처만 잔뜩 안은 채로 첫 회사를 퇴사하게 되었다. 내가 회사에서 겪었던 일은 그 누구에게도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자진해서 그만둘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추측해 보건대 당시 나의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은 최저치를 찍고 있었을 것이다. 퇴사 후 나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고 느꼈고 당연히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다. 회사 내에서 맡은 업무가 없었기에, 별 도움도 되지 않을 한 줄의 경력으로 어느 회사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어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당시 우리 집은 분위기가 험악했다. 나와 부모님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아빠는 몸이 편찮으셔서 누워만 계시는 상황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지고 의미 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눈물겨울 만큼 아까우면서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밤이 오면 잠들기가 어려워 새벽까지 깨어있는 날들이 이어졌다.


모든 문제를 그저 회피하고 싶었던 나는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실낱같은 관계를 이 희망 없는 상황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로 삼기 시작했다. 정서적 안정을 주는 요소가 모조리 제거당한 당시 상황에서 일종의 심리적 유희를 즐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회사 구성원들과 가족들에게 연달아 거부당했다고 느꼈던 나로서는 누군가가 나라는 존재를 원한다는 그 감정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고려해 보지도 않은 채 내 일상이 타인에 의해 마구잡이로 잠식되도록 방치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상대로부터 지속적인 언어폭력에 시달리게 되었고,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일한 도피처인 그 관계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고 있었다. 나조차도 내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떻게 멈추는 지도 몰랐다. 언어폭력이 물리적인 폭력으로 넘어가려는 경계의 어느 지점에서 그제야 나는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을 그 누구에게도 상세하게 말하기는 어려웠다. 내 잘못된 선택으로 일어난 결과이므로 이해받고 동정받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일어난 일을 그나마 자세히 알고 있던 친구조차 내가 가장 절망 속을 헤매고 있을 때 ‘더 이상 네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며 차갑게 뒤돌아섰고, 나는 벼랑 끝에 홀로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학업 면에서도 직업 면에서도, 또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모조리 실패한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은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정신의학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 먹기 시작한 게 그때 즈음이었다. 두근대는 심장에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잠에 들 수가 없어 항불안제와 항우울제, 신경안정제를 먹어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우울하고 불안했던 감정이 칼로 도려낸 듯 사라졌다. 물론 이런 효과가 일시적이라는 걸 알았고 약에 오랜 기간 의존하고 싶지 않았기에, 약을 복용하는 동안 얼른 원래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위빠사나’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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