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했던 마음을 다시 쓴다는 것

마음의 산책로 – 일상 속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 걷는 시간

by 순간의 기록자

[메인이미지 대체텍스트: 노란 꽃으로 둘러싸인 산책도로와 고가도로 “양옆으로 노란 꽃이 가득한 보도를 따라 곧게 뻗은 산책길. 흐린 하늘 아래 길 끝에는 고가도로와 멀리 도시 건물들이 보인다. 길 양쪽을 감싼 꽃들은 바람에 한 방향으로 기울어 있다.”




누가 뭐라고 한 적 없다.

그런데 나는 자꾸 짓눌렸다.

글을 쓰려 하면, 뭔가를 꺼내려하면

자꾸 ‘이걸 써도 되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오래전 기억의 그림자

어릴 적 유괴에 대한 기억이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OO복지원이라는 이름의 수용소 같은 곳에 어이없이 잡혀 들어가, 가족이 나를 찾아 헤매던 만 3년 이상의 시간 동안 그곳에서 나는 아주 다른 시간을 살았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사랑받고 사랑주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가슴속 응어리들이 하나둘, 시간과 함께 옅어져갔다.


하지만 책을 읽다, 일상을 살다 보면

문득 그때의 감정이 소환되어 다시 되새김질하게 된다.

글로 풀어내보려 끄적이다 보면,

‘이건 너무 사연 같지 않나’

‘이 심란함을 굳이 글로 써서 얻는 게 뭐람’

하는 생각들이 따라붙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손이 멈췄다.


0529_글중간2.jpg 가까이서 본 노란 꽃 한 송이 " 꽃 한 송이가 선명하게 보이고, 뒤쪽으로는 흐릿하게 다른 꽃들이 배경처럼 어우러져 있다.



마음을 가볍게 해 준 한마디

최근, 마음 맞는 사람과 그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런 기억을 꺼내는 게 사연팔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도 있고…

그래서 못 쓰겠더라고요.”


그 사람은 마음을 담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쓰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나는 농담처럼 되받았다.

“싫어요, 안 쓸 거예요.”


그 대화는 거기서 끝났지만,

그 말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부채감을 품고 있었을까.’


나는 그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기억을 딛고, 내 호흡으로

소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채워나가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책도 있고,

떠오르는 감정들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나라는 사람이 있다.


꼭 뭔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책을 읽다, 일상을 살다,

삶의 순간과 맞닿아 떠오르면

그냥 적어도 되는 거 아닌가.


누구에게 설명하려고 쓰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내 이야기를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생각.


0529_글마지막3.jpg 길가에 핀 노란 꽃 무리 “활짝 핀 노란 꽃들이 바람에 살랑이며 퍼져 있는 모습. 선명한 노란색 꽃잎과 초록색 줄기가 대비를 이루며 생기 가득한 분위기를 전한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믿는다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나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같은 책을 읽는 내내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싸우며 읽는다.


어떤 사회적 부조리와 시스템이 인간을 어떻게 짓밟는지를,

그 속에서도 존엄을 지켜내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는 멈춰 서서 오래 바라보게 된다.


읽는 내내 슬프고, 아프고, 두렵고,

때로는 냉소와 분노에 가까운 마음도 올라오지만 그럼에도 나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다 보면

결국 "나는 여전히 사람을 믿는다." 였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사회는 혐오와 차별과 부조리의 극치로 치닫고 있는 걸

매순간 목도하지만,

그 속에서 치열하게 분투하는 사람들을 보며

끝내는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흔들릴 때도,

어떤 순간엔 서늘하게, 또 어떤 순간엔 뜨겁게 서 있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한다.


글을 다시 쓰고 싶어진 것도, 어쩌면

그 희망을, 사랑을

내가 여전히 믿고 있다는 걸

조용히 나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다시 써보려고 한다.



그렇게 다시 쓰는 마음은, 취향과 감각의 바람을 타고 조금씩 확장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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