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미는 감정의 풍향계 ② 열린 마음에 깃든 바람

마음의 산책로 – 일상 속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 걷는 시간

by 순간의 기록자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맑은 하늘 아래 억새가 바람에 흔들린다. 말없이 흔들리는 풀잎처럼, 마음이 열린 자리에 조용히 머무는 감정의 결을 담고 있는 듯하다.]



* 이 글은 『내 취미는 감정의 풍향계 ① 잃은 마음 위로 흐른 음악』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첫 편을 먼저 읽으시면 글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기억의 결을 따라 이어진 마음의 산책길, 그다음 발자국을 함께 내디뎌 주세요.








그러다 책이 찾아왔다.

정확히는, 나는 늘 책 가까이 있었고,

책은 나를 여러 번 지나쳤다가 어느 날 비로소 내 곁에 머물러 주었다.



책, 나의 오랜 도피처

처음은 동서양 명작동화와 위인전이었다.

부모님은 책에 관대하셨고, 집엔 수백 권의 책이 있었다. 어릴 땐 재미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가장 큰 원동력은 부모님의 칭찬이었다. 나는 그렇게 책과 엷은 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중학교 땐 책을 즐겨 읽던 짝꿍 덕에 그 친구에게 책을 빌려 읽으며 명맥을 유지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땐 손에 꼽을 정도로만 읽었지만 이상하게 그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멋도 몰랐지만, 책이 나를 관통하는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 주었다.


시간은 온전히 나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의 위치로 이동시켰다.

불안과 무기력, 텅 빈 깡통처럼 느껴지는 삶의 순간. 질식할 것 같은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다시 책을 찾았다. 생각이 과하게 몰아칠 때, 누군가에게 마음을 크게 다쳤을 때, 그럴 때면 평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책 더미에 파묻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저 마음이 닿을 때까지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책 더미 속에 파묻히는 시간은 세상으로부터의 회피였다. 복잡한 생각과 상처 입은 마음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활자 속 세상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나의 두 번째 숨구멍.


KakaoTalk_20250608_132047748_08.jpg 도심 속 나무 테크 길에 저녁빛이 내려앉은 듯한 보행길. 단정한 조명 아래, 고요하게 자신만의 리듬으로 걷는 듯, 삶의 숨결이 묻어 있는 듯하다.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절친과 바람이 났던 상대가 있었다. 상대 또한 그랬지만, 내 가족 같았던 10년 지기 친구의 배신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두 달 가까이 방에 틀어박혀 먹는 둥 마는 둥 씻지도 않고 책만 읽었다. 그런 내가 걱정되어 함께 살자며 불러줬던 친구 중 한 명이 내 방 문을 열고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책 좀 그만 읽어. 이런 식의 폐인은 또 처음 본다.”
그 말을 하며 책을 집어던지고, 나를 거실로 끌어냈다.


그때 나는 책을 ‘읽었다’ 기보단, 그 속에 나를 숨기고 있었다. 세상이 느닷없이 멱살을 잡아채듯 덤벼들 때마다, 나는 책으로 도망쳤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책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처절한 발버둥 같은 몸짓이었다.




KakaoTalk_20250608_132047748_04.jpg 햇살이 스미는 나무 그늘 아래의 산책길. 복잡한 마음을 지나, 감정 변화에 보조를 맞추듯 천천히 걷고 싶은 길.


책으로 걸어간 내면의 길, 글이 되어 피어난 세상

그렇게 치열하게 버티듯 살아내다 비로소, 치열함 속에 깃든 따뜻함을 읽어낼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이번엔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욕심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읽은 권수에 집착하고, 시작한 책은 무조건 끝까지 읽어야 한다고 정하고, 그동안 읽지 못했던 것을 보상받으려는 듯, 책이 나에게 소화되기도 전에 게걸스럽게 읽었다. 생각에 잠기고, 정리해서 글로 남긴다는 건 낭비처럼 여겨졌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독서가 아니라 ‘증명’이었다.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안심되는, 허기진 마음의 습관. 바닷물을 마시듯,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그럼에도 나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책과 함께 녹여진 7년의 시간이 새로운 좋은 벗과의 만남을 통해 드디어, 나에게 말을 걸어주기 시작했다. 최근 모임에서 책과 음악, 영화에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그와의 대화는 내 안에서 잊고 있던 감각들을 깨우고, 편협했던 나의 취미 활동에 물음표를 던져 주었다. 7년의 시간 동안 그렇게 쓰는 게 어려웠던 글쓰기까지 포함해, 무시되었던 익숙한 것들이 다시금 설레게 느껴지더니, 거대한 쓰나미가 몰아치듯 나를 내 달리게 하고 있다.


뭐랄까... 그 시간이 돌고 돌아 책이, 일상이, 나에게 말을 거는 기분이다. 일상의 한 순간,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멈춰 감정이 투영되고, 생각에 잠기며 글을 쓰고 있다. 요즘은 나만의 호흡으로 삶의 의미를 음미하듯 알아가고 있다.




KakaoTalk_20250608_132047748_01.jpg 맑고 높은 하늘 아래, 연둣빛 나무들이 서 있다. 길 위로 사람들의 움직임이 스며들어 있다.


점점 더 확장되는 나의 ‘감정의 풍향계’

75인치 TV는 관상용으로 두고, 그 시간에 책을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나.

관심 있는 영화나 드라마도 요약본으로 때우던 나였다. 그런 내가, 그와의 소통을 계기로 취미의 방향을 또 한 번 틀게 되었다.


“안 볼래.”
“별로야.”
“난 그건 아니야.”

그렇게 선을 긋던 태도에서 벗어나 이제는 대사 한 마디, 영화적 배경과 서사를 음미하며 그 의미를 되새긴다. 영화 속 인물 군상을 통해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해하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얼마 전까지 공포영화를 보지 않았다.

“뉴스만 봐도 현실이 공포잖아. 아름다운 영화를 볼 시간도 없는데
굳이, 내 돈 내고 무서운 걸 왜 봐?”

그랬던 내가, 그의 추천으로 본 공포영화는 내가 외면했던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그림자를 마주하게 해 주었다. 아직 서툴지만, 이제는 병아리 공포영화 입문자로까지 나아가 그 안에서 존엄, 두려움, 그리고 인간의 진심을 좇고 있다.



KakaoTalk_20250608_132047748_09.jpg 분홍빛과 오렌지빛이 퍼지는 노을 하늘. 해가 저문 하늘에 분홍빛이 번진다. 오늘의 감정을 잔잔히 마무리하고, 다음 바람을 맞아 들일 마음을 담은 듯한 풍경.


새로운 바람이 부는 곳

지금의 나는 권수에 쫓기지도 않고, 혼자만의 방식에 갇혀 있지도 않다.

책과 음악은 여전히 곁에 있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권유에도 마음이 열린다. 새롭게 만난 감정의 결은 나를 설레게 하고, 취미는 또 한 번 방향을 바꿨다. 경험에 경험이 더해지며, 이 확장은 더 풍요로워질 것 같다.


돌아보면, 내 취미는 단지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아니었다.

감정이 머물던 자리들을 따라 자라온 기록이었고, 세상을 조금씩 다르게 바라보게 만든 내 감정의 풍향계였다.


새로운 바람은 낯설지만 설렌다.

견디기 힘든 시기를 건너 마음에 새겨진 나이테는 오늘을 살아가는 근간이 되고 있다.

나의 풍향계는 다음엔 또 어떤 방향을 가리킬까.



바람이 분다...


keyword
이전 03화쓰지 못했던 마음을 다시 쓴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