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붙잡는다는 것 – 예원제를 지나, 지금의 나에게

마음의 산책로 – 일상 속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 걷는 시간

by 순간의 기록자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어두운 배경 속, 진 쳉이 연기한 예원제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얼굴 한쪽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우주의 이미지와 거대한 눈동자가 드러난다. ‘3 Body Problem’과 공개일, 넷플릭스 로고가 함께 배치된 공식 홍보 포스터.



*이 글은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특히, 2부 속 예원제의 선택에서 파생된 개인적 감상을 중심으로 쓰였습니다. 예원제의 주요 장면과 결정을 언급하고 있으니 아직 2부를 시청하지 않으신 분은 참고해 주세요.






최근 취미의 반경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그동안 ‘나랑 안 맞아’라며 선을 그었던 장르들,

이를테면 공포영화나 SF 같은 영역에도 발을 들여놓고 있다.

계기는 단순했다.





창작자가 애써서 만든 결과물을 찾아보는 것에 애정을 가진 한 사람과의 만남.

일상을 표현하는 글 한 줄,

오고 가는 말 한마디와 행동에서,

세상을 향한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그의 시각과 뿜어져 나오는 삶의 태도와 지향이 느껴졌다.

특히 그의 넓은 시야는 좁은 취향에 갇혀 있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그동안의 나의 취미는 음악, 좁은 장르의 책으로 분절되고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좁은 취향으로 넓은 시각과 사고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 내가 이솝우화—해님과 바람에서 바람이었구나 싶었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은 수용성이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자연스럽게 바뀐다.

단숨에 그 동안의 의심을 거두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삼체>가 던진 질문

다른 모임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얘기가 나오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다.

양자역학, 기존 물리학 법칙의 부정 등,

인류의 분열 속에 인간성과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생각할 거리가 많겠다 싶어 냉큼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보는 터라 다음 편으로 쓱쓱 넘어가진 않지만

재미있게 보고 있다.


드라마의 큰 흐름은

중국 작가 류츠신의 책 <삼체>를 원작으로 드라마화한 작품으로

폭넓은 과학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만든 SF 대작이다.

높은 지능을 가진 태양이 3개가 떠있는 척박한 별에 살고 있는 외계인이

지구를 차지하기 위해 쳐들어오고 그에 맞서는 이야기다.


2화를 보다 한 장면에서 발이 붙잡혔다.

1960년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비극적인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함에도,

자연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했던 물리학자 예원제가 나온다.


그러다 결국 인간의 희망 없음에 대한 결론에 다다르고

예원제가 외계 문명에게 회신을 보내는 장면.


“지구는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 정복하라. 내가 돕겠다.”



너무 단호하고, 너무 깊었다.

단순한 배신이라기엔 그녀가 도달한 감정의 결이 복잡하고 처절해 보였다.




예원제의 절망, 그리고 나의 현실

그리고 그 장면을 곱씹으며, 내 삶과 지금 이 사회를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적지 않은 시간을 시민단체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활동을 하며 마주했던 현실이 예원제의 상황과 겹쳐졌고,

수위의 차이 일뿐 그녀가 그 말을 하기까지 겪은 장면들이 어쩐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새로운 연구소 설치로 위협받는 새들의 서식지.

그것을 막고자 애쓰는 사람을 보며 예원제는 잠시 희망을 느낀다.

설득하고, 위치를 바꾸려 노력하지만 결국 그 시도는 실패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게 한 사람과의 재회.

참회를 묻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대답.

“다시 돌아간다 해도 네 아버지의 머리를 밀 베듯 싹둑 베어버릴 것” 이라는 절망스러운 대답.

그녀는 결국, 사람에게, 구조에게, 변화라는 말에게 절망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외계에서 침공을 하지 않겠다고

신호를 보내온 평화주의자에게 회신을 보낸다.



삼체_이미지2.jpg 넷플릭스 <삼체>에서 젊은 예원제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장면. 얼굴 절반에 어둠이 드리워져 그녀의 내면을 암시하는 구도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문명은 이미 자구력을 잃었다고.

이 세계를 점령하도록,

자신이 돕겠다고.


그 장면을 보며 문득 들었던 생각.

“예원제가 외계인에게 회신하기 전의 모습,

그게 어쩌면 지금의 나일지도 모르겠다.”


혐오와 차별, 폭력과 무관심이 일상이 된 사회 속에서

그래도 나는 아직 희망을 말하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

작고 더디더라도, 손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 덕분에 나도 이 말을 붙들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래서 무서웠다.

이 말을 놓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단순히 절망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그 반대편의 신봉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

그래서 그 상상이 더 차갑고 서늘하게 다가왔다.

그 순간,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예원제와 다를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변절’과 ‘버틴다’는 것의 의미

TV 화면을 끄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문득, 우리 사회의 몇몇 얼굴들이 떠올랐다.

내가 지향하는 사회가 현실의 벽 앞에서 일순간 퇴보하고 좌절될 때,

순간적 무기력과 무력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젊은 날, 노동자와 시민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

지금은 가장 앞장서서 그 목소리를 억누르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며,

나는 예원제가 느꼈을 절망의 깊이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한때의 신념을 지워야 지금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듯한 말과 행동.

그것을 보며 나는 ‘변절’이란 단어가

가장 뜨겁게 믿었던 사람들이,

그 믿음에 배신당했을 때 생기는 깊은 균열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행동이 측은지심으로 이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생각해 보면,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버틴다’는 것에 방점을 찍었을지 모른다.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온갖 시련과 흔들림을 겪었겠지만,

그 믿음에 대한 배신은 스스로가 내린 결정이지, 아무도 그 믿음을 종용하진 않았다.


세상은 비록 더디지만 사회 전체를 넓고 깊게 조망했을 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다.




‘버팀’을 넘어 ‘확장’으로

그러다. ‘아, 질문이 잘못되었구나.’ 싶었다.

‘다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사람은 원래 변하지 않아”로 귀결되고,

‘버틸 수 있을까’라는 말은 끝이 정해진 싸움을 전제로 하게 되는 거니까.


언제까지 버틸 건데?

무너지면 어떡할 건데?


그래서 질문이 잘못 됐다고, 닫힌 질문이 아닌 열린 질문으로 다시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신념과 행동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 안에 담긴 결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그 성취와 의미, 존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응원하며, 함께 가자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나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얼마나 더 확장할 수 있을까’를 질문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질문이어야 한다고.


‘버틴다’는 말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전제를 품고 있기에, 나는 ‘확장한다’에 방점을 찍고자 한다.

감각과 가능성을 더 열고,

더 듣고, 더 깊이 사랑하려는 움직임,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확장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감지할 수 있는 희망의 결을 따라

같은 마음으로 이 지구에 뿌리를 내리고 걷고 있는 이들과 함께,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라 다짐해 본다.




글을 쓰기 전엔 마음이 좀 심란했는데,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과,

추운 겨울 거리에서 함께 응원봉을 들었던 모든 이들을 생각하니

뒤돌아서 흐뭇한 마음이 밀려온다.

글을 마치고 나니, 다시 그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어진다. 다음 편,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눌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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