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미는 감정의 풍향계 ① 잃은 마음 위로 흐른 음악

마음의 산책로 – 일상 속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 걷는 시간

by 순간의 기록자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햇살이 비스듬히 골목을 가르는 이른 아침, 낡은 외벽 사이로 롱코트를 입은 여성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다. 입김처럼 피어오르는 연기가 머리 위를 감싸고, 오래된 건물과 벽면 포스터가 시간의 흔적을 드리운다. Camel의 'Stationary Traveller' 앨범 커버.]






내 취미는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한 번 마음이 쏠리면 다른 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시절 내겐 그게 집중이라 여겨졌고, 어쩌면 생존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그렇게까지 절실했을까…?




초등학교 3학년 가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 나는 유괴되었다.
눈을 떠 보니 낯선 도시 부산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경찰에 곧 발견되었지만 그 후의 일들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훗날 성인이 되어 알게 된 사실은, 그해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있던 시기, 정부가 ‘거리 정화’라는 명목으로 신분증이 없거나 불확실한 사람들을 무작위로 수용소에 끌고 갔다는 것이었다. 아이든 어른이든 가리지 않았다. 나는 경찰 손에 이끌려 ‘보호’라는 명분 아래 '복지시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상 군대식으로 운영되는 수용소에 갇혔다.



그곳은 1소대, 2소대처럼 구분된 구조였고,
성인 남성과 여성, 아이들 모두가 따로 소대로 나뉘어 각자 다른 공간에서 노역에 시달렸다. 도망치다 붙잡힌 어른들은 삭발당했고, ‘기합’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공공연히 가해졌다. 어린 우리들은 그걸 지켜보며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견뎠고,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폭력은 일상처럼 가해졌다. 감금, 정신적·신체적 학대, 기본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환경, 늘 부족했던 영양—한 번은 어렵게 구한 생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땐 얼마나 맛있었던지—나는 만 3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집으로 돌아온 후 1년 사이에 키가 9센티미터 자랐다는 사실은, 그곳이 어떤 공간이었는지를 굳이 미사여구 없이도 충분히 말해준다.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희미한 빛조차 허락되지 않던 마음의 어둠 속에서,

나는 명령과 복종만이 허용되는 날 선 긴장 속에 살아야 했다.

그 시간을 견뎌내는 동안, 부모님은 전국을 돌며 나를 찾아다니셨다. 그러던 중 다른 지역으로 확장된 시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그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부모님은 “혹시…” 하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으셨고, 나는 마침내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가슴에 멍울이 잡힌 걸 알면서도 ‘내 자식부터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병원을 미루셨다고 한다. 수술을 해도 생존 확률이 반반이라는 말 앞에서도, 어머니는 삶을 놓지 않으셨고 가족들은 밤낮으로 곁을 지켰다. 그렇게 5년을 함께 살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와 이별했다. 학교에서 뒤늦게 도착해 바라본 어머니는 그저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따뜻한 손길을 바라며 잡았던 그 손에서,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생경한 차가움을 느꼈다. 지금도 그때의 차가움을 떠올리면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낀다. 처음으로 죽음을 피부로 직면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집안을 풍비박산 낸 아이’라고 여겼다.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부모님께 이런 고통을 드리는 운명을 지녔을까. 그 자책과 죄책감은 오랫동안 나를 옥죄었고, 성인이 된 뒤에도 차가운 그림자처럼 찾아와 나를 집어삼켰다. 밝은 햇살 아래서도 문득 스며드는 서늘한 기운처럼, 그것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슬픔은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명예퇴직 후 퇴직금으로 시작하려는 사업에서 사기를 당하셨고, '그 사람 좋다'던 아버지는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가 떠난 다음 해, 딱 4일 뒤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나는 또 한 번의 이별을 겪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연이은 상실은 마치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고, 나는 표정을 잃었으며 마음은 텅 비어버렸다.



하지만 ‘부모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었고, 동정받는 것도 싫었다.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의 이름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 애어른처럼 행동했다. 지금 이렇게 담담히 기억을 더듬으며 글을 쓰는 데도 숨이 찬다. 그 어린아이가, 어떻게 견뎌냈을까. 감정은 덩어리처럼 굳어 있었고, 생각은 자주 멈췄다.

오빠와 언니를 보며 “나만 없었다면…”이라는 죄책감이 늘 나를 짓눌렀고, 그들 역시 어린 나이에 각자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지쳐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내 탓이라 여긴 일들을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질식할 듯한 그런 순간들 속에서, 나의 유일한 숨구멍은 음악이었다.
언어로 풀기엔 턱없이 부족한 마음을 대신 안아주는 소리. 말이 되지 않는 감정을 품어준 건 늘 말이 없는 음악이었다. 대중가요보다는 클래식과 뉴에이지, 프로그래시브 계열을 즐겨 들었고, 시간이 흐르며 팝, 재즈, 록, 메탈, 일렉트로닉, R&B, 인디, 발라드까지. 감정의 결이 달라질수록, 음악의 결도 함께 넓어졌다. 격렬한 선율은 울분을 토해내게 했고, 부드러운 음색은 슬픔을 어루만졌다. 세상의 모든 언어가 침묵할 때, 음악만이 조용히 나를 안아주었다.


그때의 나를 붙잡아줬던 노래를 떠올려보니 지금 생각나는 음악은 다음과 같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B단조, 작품번호 74 '비창(Pathétique)',

카멜의 'Long Goodbyes',

알란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and Wise',

잉베이 말름스틴의 'Crying',

토미 페이지의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 (Original Version)'


이 글을 읽고 그 시절 그 아이가 마음에 닿는 분이라면,

조명 꺼진 방안 구석에 웅크려서는 촛불 하나 켜놓고

응어리진 눈물을 꾸역꾸역 삼켰던 그 아이와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며 마무리해 봐도 좋을 것 같다.



* 이야기를 따라 함께 산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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