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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용 Oct 22. 2024

"세 딸들과 잘 살아~"

"그해 여름~~~~~~"

내가 브런치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다~

내가 브런치를 알게 된 것은 계시이다~

"작가는 인생을 두배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길에서 만나는 여느 사람처럼 건널목을

건너고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넥타이를 매는 그런 일상생활이다"

"글을 쓰면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게 평범한 것이 평범하지 않게 된다"

브런치 글에서 어떤 "가의 태도" 란 글에서 차용해 본 글이다

이 글을 만남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를 이리로 인도하고 말았다 나는 그해여름을 만나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다 그런데 수시로 그해여름은 나를 찾아온다

초대하지 않은 사람이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무작정 집안으로 들어오는 무례를 범한다

올해로 스믈 네 번째나~

그해 여름은 어머니와 사별하시고 홀로 17년을 사시던 아버지의 생이 마감되는 슬픔이 있었고

나와 함께 20년을 살았던 아내가 세 딸들과

나를 떠나는 과정을 시작하고 결국은 세상을 이별하는 슬픈 계절이 되었었다

묻어두어도 내속에서  용해되지 않는

반추로 남겨질 바에는

차라리 풀어놔 주기로했다

24년동안이나 풀어보지 못했던 앨범보자기~

오늘 풀어본다

지난주 금요일저녁 남악의 한고급 한식집에서 내 칠순을 가족들과 함께하고

그 이튿날 공원묘지 애들 엄마의

산소에서 세 딸들과 사위들과 손자녀들과

추모예배를 드리고 나서부터는 더더욱 그해여름이 간절하게 불러댄다

이제는 밖으로 나올 때도 됐지 않느냐고~

동네 뒷산에 섬 같은 102평의 임야에 부모님과 애들 엄마의 산소를 마련하고

24년간 타향살이하시던  세분을 모시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행하고부터 임을 알고 나니

올봄의 끝 오월달부터 그해 여름은 나를 찾기 시작했다

찾아드니 내 생각이 바쁘게 준비할 것들이  많아진다

나는 그해 여름의 편린들- 그것들의 재료가 될법한 나의 기억을

브런치의 서랍에 하나둘 넣어두기 시작했다 노인 일자리 근무시간에도~

 찾아오고 밥을 먹을 때에도 세수를 하는 시간에도

나의 모든 일과의 세부행동들 마저도 그해여름으로 잠식되어 가는 시간 속에서

하루에도 수차례  브런치의 서랍은 열어지고 닫히고를

반복한 일들은 새벽기도 시간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목사님은 새벽 강단에 서 있는 데

나는 그랬다~

설교말씀시작부터 그해여름과 씨름하고 있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 듯한 장면을 나도

기도 시간 내내 만들고 부수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그 순간의 생각의 흐름을 보기 위해

아니 잊어버릴까 봐 기록해 놓기 위해 메모지와 볼펜을 준비하지 못함을 후회하는

내가 되어있기도 한 새벽시간에

목사님 설교는 나의 귀를 무심하게도 지나가기 일쑤였고

다시 시작한 새벽기도는 처음에는 은혜의 눈물과 내 영혼의 회복에

어찌할 바 몰랐던 은혜의 강으로 충만했는데

지금은 직분의 임무로 아니 약속장소로 마지못해서-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에 비유하면

너무 비약이 심한 말인가~

 나나의  세상을 말하고

 내 마음을 그대로 보고 말하고 싶어 하는데

목사님은 하늘을 말하고 스님은 극락을 강조한다 등등

가당치도 않게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건

브런치의 글쓰기가  나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요즘 가만히 두지 못하는 내 맘의 출발점을 어딜까를 보아도 궁극적으로 브런치다

브런치를 핑계 함에 다른 견해를 불식한다

나의 핑겟거리가 된 브런치~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그래서 나는 살고 있고 있고 그냥 쓰고 있다

핑계는 소가 자기의 가려움을 비벼대는 언덕이다

비난의 시간에도 나의 합리화를 위하여 발동되는 핑계는

나의 유일한 피난처다

그리고 자유하다~

  어떠한 상황을 반전시킬 -그러니까 그해여름으로 인한

  내 마음을 갈무리할 종착지가 어디인지 모르고 살아오다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떠돌고 있었는데

갈곳이 있다

그곳이 브런치이다 라고 행선지가 정해지고 보니

써야 한다는 마음이 절실해졌다


2000년 6월 하순이다

지금도 내 사랍 속에서 열 때마다 나타나는

 아내의 간병기록장ㅡ오래된 일기는 다 버려졌지만

그것만은 버려지지 못하고 거기에 내 책상 맨 위 서랍에 그대로 있었다 얼마 전까지~

거기에는  아내의 그날의 상태ㅡ부종은? 피부색은? 세팅된 기계들의 숫자등도 기록되었고

눈은 떠있는지 감고 있는지 산소 포화도는? 누가 병문안을 왔는지~

애대한 물음의 답이 다 들어가 있다

나는 자그마한 일들의 일상도 놓치기 싫어하는 면이 없다고 여겼다

40년이 넘는 기간의 일상을 내다 버리면서도 별 아쉬움 없었다

조건이 되어준 일들을 만나면 소중하던 것도 버리게 되고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던 것들도 챙겨보는 눈이 생겨버리는

브런치를 만남은 아직도 내 안에만 머물러있는

나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어서

그때 나는 그랬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브런치를 만나게 되니

용기가 났다

"자그마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면

우리는 당장 원자폭탄에 의해 전멸당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브런치는 선포하고 있었다

그냥 이야기해 보라고 괜찮다고 다독여 주었다

처음에는 못 미더웠다

잘난 사람들만이 득세하는 세상이라고 치부해 버릴 뻔한 나의 옹졸함을

그냥 인정하고부터가 나의 발걸음의 시작이다

"오빠~! 언니는 살려야 되어~!"

목포의 한 종합병원의 응급실에서 나는 아버지의 얼마 남지 않는 임종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퍼런 눈자위가 보였고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모르게 얼굴은 돌아가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울아버지가 웃고 계신다 정말이다 웃고 게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뒤로 할 수밖에 없어서 울었다

마지막을 아시는 듯하신 아버지 울아버지~

전남대 학병원으로 내달리는 분초의 긴박한 시간에도 아버지의 미소가 사라질까 봐서

마음은 아버지가 게시는 응급실에 있었고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서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 시간에도 목포 병원에서부터 ㅇ대학병원 응급실까지의 환자의 감시를  맡은 간호사는 분주하게

응급차에 매달린 환자의 세팅 의료 장비를 보고 만지고~

응급차의 내부는 긴장감으로 꽉 차있었다

아버지의 상태가  생의 마지막으로 가고 있던 시점에 일아난 응급환자 이송작전 차량에

나는 탑승하고 있다 가 아버지 옆에 있어야 할 장남이 아닌가?

"오뺘 언니는 살려야 돼!"

여동생의 한마디는 거역할 수 없는 목사님의 말씀의 선포였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그 말씀 나서서 반론 제기할 교회신도 어딨어요?~"

대학병원으로의 이송 중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큰 며느리이다

그러니 글쓴이의 아내이다

아내는 십여 일 전에 급성 대장 괴사로 인한 항문 출혈로 인해서 대장 1m 이상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울면서 전화가 왔다 간병하다가 잠깐 짬을 내어서

논에 농약을 뿌리는 중에

"나 수술하니까 목사님께 기도 해주라고 해요!~"

나는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 광주의 대학병원으로 응급구급차의 주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응급실로 실려오셔서 생의 마지막을

붙잡고 계시는데~그 시간쯤에 큰집 전번 서울의 합정동에서 둘째 아들을 결혼시킨-마레이지아 선교를 20년이 넘도록 하고 있는 사촌동생은  아버지 귀에다가 " 작은 아버지 사랑합니다~!"를

전했다는 이야기는 여동생으로 들었다

아내를 데리고 이렇게 응급차에 있는데-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을 붙잡고 계셨다

압해도 고모네 동네에서 야윈 소 한 마리 사 오시다가 소가 배를 뛰쳐나가서 수영도 제대로 못 배우셨는데

뛰어든 찬 바다에서 소를 잡아오셨다

우리 집 재산을 일궈주셨다

나는는 아무것도 없는데 울아버지는 많이 남겨 주셨다-그리고는 이렇게 라도 당신의 이야기를

보내달라고 하셨을까~ 브런치에 나와 눈물이 나드라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듯~

그 며느리도  곧 죽는다고 한다-오늘이다

그래서 나는 동생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

둘다 오늘 죽는다는데 살려 내야할 우선순위 에서 밀려나신 울아버지~

우리 동생 야무지다~

고천암 그 너른 뜰에는 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여동생이 희미하게 나란히 선 호미들의

행렬에 함께한다

메고, 뽑고, 뿌리고, 베어내고 돌덩이 같은 척박한 간척지를 여린 손이 헤쳐 나왔다

지체하다가는 둘 다 함께 이곳 목포 응급실에서 죽음을 보게 될 것 같았다

쓰기도 싫지만 쌍초상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동생은 말한다

"아버지는 그래도 사실만큼 사셨으니 올케는 살려야 돼!"

아버지 현재의 내 나이 칠십이셨다

아버지는 불과 한 달 전에 칠순을 맞으셨다

나도 금방 칠순을 맞은 지 한 달이 되어간다

나 같은 아버지가 우리 집 온기 있는 큰방 이 아닌 응급실에서 연명치료의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하시고 계시는 시간에~

"대학병원으로 가셔야겠어요"

수술 잘되었다고 했는데~

담당의사의 힘없는 말은 나를 당황스럽게 하면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데 오래의 시간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아버지 이렇게 되셔서 오시기

이틀 전에 입원한 며느리 병문안 하신다고

병원에 오셨다

집으로 모셔다 드리는 중 면소재지 옛날 막걸리공장옆 중국집에서 같이 동행한 동네동생 이랑 짜장면을

사주신 아버지가 오늘 이렇게 되셨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이야~

아내의 수술 결과에 좋아했었다

교회 목사님께 기도해 주셔서 고맙다는 전화도 드렸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기대를 많이도 했는데

오늘 죽는다! 고 한다 청천벽력이다!

이러한 모든 일련의 목포 병원의 퇴원 및 광주대학병원 긴급이송 절차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에

학교를 가려던 큰딸이 화장실을 갔는데

할아버지가 쓰러져 계신 것을 보고 나에게 전화가 왔다

아니다 큰딸이 그때가 21살이니까 목포의 한 버스회사의 신입으로 들어 간지 얼마 안 되는

경리 직원이었다

경리 직원이래야 버스 돈통에 쌓인 동전과 지폐를 세어 하루의 수입을 결산하는 일과이면서도

돈이 부족하는 난감함도 감당하던 때였다

"아빠 할아버지 쓰러지셨어"

"빨리 삼촌한테 전화해라~!'

삼촌 은 한동네에 사는 이종사촌 형님이다

아버지는 지금 같으면 출동 119구급차로 의료혜택을 받으면서 병원까지 오셨을 테지만 그때만 해도

  어두운 세상이었다

좁은 화물차를 타시고 응급로 도착하신 아버지는

나의 조심스러운 예측으로는 돌아가시고 계셨다~아버지 자신 죽음을 수용하시는 마지막 단계를 순응하시고 계셨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 나 광주대학병원  갔다 올게요~

내 걱정 말고 잘 갔다 오라고 하시는 듯

웃음을 나에게 선물로 남기신 울아버지~

아버지를 향해서 연명치료에 대한 일말의 여유조차도 없었던 야박함을

이야기하던 우리에게 "나는괜찮다~"는듯

웃으신다  염려말고 대학병원  잘갔다 오라는듯~

아니 그때는 다들 하는 산소 호흡기라도 해드렸어야 했는데~

 지금 우리에게 는 크나큰 죄책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런데 또다시 그때로 돌아가보면 그때의 조치들이 미안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고 핑계함으로 편해지고 싶음도 있으니~~

대학병원 응급실의 어수선하고도

  복잡한 분위기로 입원 수속도 도착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나서야 끝낼 수가 있었다

애들 엄마는 목포에서 수술을 하고 왔지만

다시 시작된 입원진료검사가  끝날즈음~

"형님 아버지 돌아가셨어"

응급실 과장한테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내려가봐야겠어요~"

"곧 오늘 아주머니 돌아가시는데 보호자가 없으면 안 돼요 내려가실 수 없어요!"

"사촌동생한테 맡기고 가면 안 될까요?"

사촌동생과 통화를 했었다

자네가 대신 보호자를 좀 해주면 아버지 빈소로 가겠다고 말해놓았다

보호자인 내가 응급실을 지켜야 한다고 허락을 안 해주었다

몇 번을 말해보아도

"아주머니 오늘 돌아가실 수 있어요"가 대답으로 돌아오니 자연 포기도 빨라지고는

나는 응급실의 환자 보호자로 남겨졌다

아버지의 부고를 받는 아들이라니~

마음이 가볍지 못하다

아버지의 부음에 대한 슬픔의 큼도 있었지만

큰아들로서 아버지의 마지막길에 인사드릴 수 없음에 대한 죄책감은

세상 어떤 것의 죄에 대한 체벌이나 징벌 보다도 크게만 다가왔다

아버지는 아침에 오셔서 병실로 올라가시지도 못하시고 오후에 돌아가시고~

나는 대학병원 응급실에 오늘 죽는다는 아내의

보호자로  있는데 시간은 지나

그로보터 사흘 후

장남이 빠져있는 아버지의 장례식은

급조된 병원부지에 안장되심으로 끝났지만

나는 이펜을 놓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질곡 같은 인생의 마지막은 여기서가 마지막이지만

마지막을 대하시던 아버지가 웃음을 선사하신 이유를 알아채고 있기에

나는 이 글을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가 또 생긴다

아버지께 "나 광주병원으로 갑니다~"

아버지는 다 아시는 듯 미소를 보내주신 것 지금도 감사하다

아버지가  너무나  갑자기 응급실도착  하루 만에  세상을 뜨신 것은 내 책임에서 난 자유롭지 못했다

아내가 지금 죽는다고 대학병원 이송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응급실내 아버지는 연명치료의 어떤 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신 채 방치되는

상황을 식구들은 모두가 동조하던 분위기로 되어 있었다

산소호흡기를 장착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살려내려는 어떤 노력도 없었다

그저 링거를 꽂아 놓은 것뿐 ㅡ입원환자임을

확인받는 것처럼~

아버지 돌아가시고 24년이 지나고  나서

그해 여름의 일들을 끄적거려서   브런치의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그 서랍은 발행이 되지 않으면

거기 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갇혀있음이나 나와있음이 매일반인 마음의

양면성 ~

요즘의 나의 마음이 머무는 자리가 되는 화두에서

바라보니~

브런치서랍은 작은 나의 우주이다

나는 브런치의 사랍을 우주라고 생각하는 순간 ~

온몸에 형언 할수없는 전율이 흘렀다~!

칠순을 보낸 촌로의 진심이다-촌노라고 쓰기도 미안한 나이가 요즘의 칠순이다

월출산 천황봉을 올라서서 두 손 들고 포효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큰딸은 아빠의 인생샷이라고

칠순의 가족모임의 배경으로 크나큰 플래카드를 내걸어 주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인간의 양면성의 지루한 설교 같은 답사를 했더니

아빠의 문제는" 길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들 해대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 오 남매와 가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고

그런 세상을 만났으니 어찌 자유롭지 않을쏘냐~

덩실덩실 춤을 추는 나를 안고 오늘도 아니 이 시간도 쓰고 있다가 아닌 두드린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어떤 복음의 어떤 구절인지는 찾아볼 것도 없이 모두가 다 아는 상식이다

두드리면 열리는 곳에  내가 나섰다

두드리기 위해서

그의 결과는 계시 즉 열림이다

용인에서 두 아들을 키우는 작은 딸한테서

최근에야 들었다

"학교에 가면서 병원에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지연아~학교 잘 다니고 잘살아라~"

"아버지 나한테 그런 말씀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요~!"

나의 불효함이 끝내 용서받지 못한 거 같아서  슬펐다

"오빠 올케는 살려야 해!"

이러한 동생의 외침에는 아버지는 연명치료하지 말고 이 모습 이대로 편안히 가시도록

그냥 내버려 두자고 한다   그 말이 진심이었다

단호한 누이동생의 말 한마디를 애타게 기다렸던 것처럼 난 응급차에 동승되었고

아버지의 무덤이 어딘지도 모르고 지내던 내가

아버지를 찾아 나선 것은 어떤 일 때문에 집에 갈 사정이 생겨서였다

보호자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응급실의 체계에서 중환자실로 보름쯤 이송 후였다고 기억 된다

막 취업을 나가서 얼마 안 된 시점에서 퇴사하고 간병을 하는 둘째가 있어서 가능한 외출이었다

아버지 묘소에서 엎드려 사죄의 눈물을 흘렸다

장남 된 사람으로서 아버지 상 당함의 모든 절차 안에서 울고 수고 했을 동생들의 시간에 함께 하지 못했음이 죄송한 나의 마음이었다

준바해 놓으신 선산으로도 가시지 못하시고 병원부지에  아버지는 영면하셨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의 생활도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무르익어간다

반복되는 좋아짐과 나빠짐의 시간들의 연속이다

"당신이 뭐를 할 수가 있어요?!"

나의 무능함이 피부로 와닿는다

서러움이 밀려온다

아는 자의 횡포를 만나고는 무너진다

우리는 조금 알고 있는 것도 많이 아는 것처럼 포장해야 영향력이 있을 것으로 안다

그리고는 그것들이 모르는 자를 만나면 나의 득세가 되고 상대는 몰락하기를 바란다

상대의 약해진 모습에서 나의 강함이 빛을 내는 성과 ~

통통 부어있는 투석관이 아내의 생명을 붙잡고 있었다

생명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거린다

피가 뭉쳐서 투석관을 통과하기가 힘들다

안 되겠다

이거 라도 해주어야 한다

마지막을 얼마 안 남긴 시잠에 대한 인식은

목포에서부터였다

"오늘 죽는다"고 했다 목포에서~

그래도 "오빠 올케는 살려야 돼~!!!"

여동생의 말은 나의 신념이 되었고 만약 살려내지 못하면

그 한을 어찌할 것인가 이제 아버지도 안 계신다

"아버지 식사하세요"조촐하면서도 정갈한 아버지의 밥상을 들고 큰방으로 들어서는 며느리

내 세 딸들의 엄마이자 나의 사랑이다

신혼여행도 못갔었다

결혼식 뒷날 나는 전남대학교 강당에서

방송대학 입학식이 있었다

둘이 손잡고 입학식에 참석했다

같이 손을들고 선서도하고

입학식이 끝나고는 짜장면을 먹었던것같다

아가씨의 시절 비 오는 날 오후 난 부대에서 외출을 받아서 목포로 가는 승강장에 꽃무늬 우산을 든 앳된 모습의 부대 근처 아가씨가 서 있었다 ' 아가씨 어디 살고 연락처는?"

묻고는 시작된 군대식의 나의 사랑이 시작된 후 6개월 만에 큰딸을 가졌었다

같이 여행다닌 기억도 없는데~~

그 사랑이 꺼져간다

생명의 투석관이 막혀간다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사람 세상천지에 누구랴~

투석관을 비벼댔다

한 겨울 추울 때에 얼굴을 비벼 대는 것처럼~

내가 비벼 댄다고 좋아질 리 없는 생명인 것을

익히 알아버린 내가 밉다

이렇게 포기를 속히 결정짓는 나를 보니

한심하다~

옆침대의 아주머니는 7년 동안이나 남편의 뼈를 닦아

누런 빛을 내고 있었는데~

고작 석 달 넘어가니 포기 어쩌고 죽을 줄 안다 저쩌고 나의 인격에 대한  인성에 대한 한없는 실망이 온다

한없는 미안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의  쌓임 만큼이나  무거워지는 이것을 이제 내려놓기 위한

처방으로 나를 초대한 이 공간은 귀하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상쇄하기 위한 나의 합리화가

발동되는 행위 그것뿐이었다

그러한 내 마음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저씨가 뭘 할 수 있어요?!"

할 수 없음이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서 내가

요동한다

그래 나는 의학적 지식도 전혀 없고 병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관리원들이 퇴근한 대학 내 연구실을

뒤졌다

저렇게 고통을 주는 병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이병은 이러이러하니까 이러저러한 처방과 악복용이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담당의사와 간호사한테

말도 안 된다

그때 야간 연구실 무단침입죄로

고발당하지 앓은 게 다행이다

나는 뭐든지 해보고 싶었다 그때의 심정으로는~

이것이 나의 사명이었다

간간히 중환자실은 지하영안실로 가는

분도 있고 "아따 영감 소용없어 못살아!~"  하시면서 오고 나서 침대에 새로운 침대보를 갈기도전에 집으로 가는 할머니는

그때는 모질고도 인정머리 없는 할망구로

생각했는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는 마음도 있다

어떤 때는 돌아가신 분을 그러니까 시신을 영안실로 운구하는 일도 하고 중환자실

환우가족의 자격으로 조문하고 그간 먹고 싶었던

술을 취하도록 퍼먹기도 했다

취하는 것만이 현실을 잊는 묘약으로

그것을 선택하고 보니 새벽까지 이어진 조문절차도

마무리된다

믿는 구석은 용인으로 시집가서 아들 둘 낳고 사는

둘째 딸이 있어서였다

한치의 핑곗거리도 아니 어떠한 반론도 제기할 수 없었던 말~

"아저씨가 뭐 할 수 있어요!"

듣는 순간

바로인정되는 설움을 보았다

그렇구나 아무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사람 아니구나

할 수 없음으로 각인된 공간에서 탈출해야 한다

나는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게 남광주 시장이 바라보이는 도로에서 무조건 택시를

세우고는

"무등산으로 갑시다!"

흐르는 눈물은 있었지만 소리 내어 흐느끼지 못하는

택시라는 공간의 부자유함 속에서 감옥 같은 시간을 달려온 끝에  무등산 등산 초입 쉼터의자가 있는 곳에서 정신없이 소원기도문을 적어내었다

"꼭 살아서 아버지 추도예배를 참석하기를"

"애들 시집가는 거 같이 보기를"

급조된 기도문의 기도제목은 두 가지 정도였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A4용지 한 장을 거의 채웠다

살아오면서 나의 잘못해 준 부분이라도

거기에 있었으면 한다 지금 심정으로는

그 생각은 없다 야속하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한 것 같다

그러니 사랑한다는 말도

분명 없었으리라 본다

지금 같으면 남하고도 손가락 하트를 날리는

선진문화의 의식변화에 민감해지려는

칠십은 늙은 것도 아닌데~

나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생각에 따라서 오면 반겨 맞아주고

보낸다 손가락하트를~

써서 묻은 신에게 상소했던 기도문이 궁금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엇을 기도했을까?

나의 그때 중환자실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막내딸과 함께 3년 경이 지난 후 그 장소를

찾았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이후 2003년 어느 날이었다

팠다

무등산 등산로 초입 쉼터 의자밑을 파기시작했다

거기에 묻어둔 기도문을 찾으려고 ~

잔돌을 긁어내고 손톱에는 흙이 들어가고

아프기도 했지만 더 깊게 묻지는 않았을까?를

되뇌며 파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 포기가 안되면 멈출 수가 없다

호남선 하행선기차가 목포역에서 더 이상 가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삼학도를 거쳐서 고하도 해남땅끝

을지나 진도 그리고는 제주도까지도 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야 우여곡절은 언급할 필요도 없는 말이다

기차가 목포역에서 더 갈 곳이 없음을 알고 포기하자

정지된 기차는 안전하게 승객을 하차시킨다

"어디다 묻어놨는지 잊어브렀다"

"진짜로 아빠 기도문 써서  묻어놨어?"

의심 어린 막내딸이 서운하다

마음을 몰라주면 서운하다

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기정사실이다

"그랬단 말이다!" 퉁명스러운 말투에서 아빠를

알아차린 셋째 딸은 아름다운 세상을 펼쳐보라는 바람으로 내가지어 준 이름을 달고 사는 막둥이다

그 딸을 낳을 때 셋이나 낳았다고 의료보험초창기에

혜택을 못 받아 낳은 지 아프고 힘든 배를 부여잡고 이틀 만에 원문을 나서는 내내

내 눈에는 아내의 배만 보였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의 인구정책은

나를 주범으로 몰아갔고 아내는 나를 몰아세웠다

"당신이 묶어 브라야 한디~"

묶어버리면 힘이 없어져서 일하는데도 지장이 생기고

내가 벌어 먹여야 되는데  가장이 비실 비실 하면 어쩌겠냐고

끝까지 오기를 파서 결국은 산부인과로 갔었다

"틀림없이 뱃속의 셋째는 아들이구만"

집안 아줌마의 말에는 믿음이 생겨서 이제야

남자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계기를 선물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 딸이다

허망함이다 묻어둔 애들엄마를 향한 기도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허탈했다  

막내딸이 아빠의 마음만 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딸을 낳으면 대를 잇지 못하는 불과 40년 전의 아득함에서

작금의 인식변화에 적응하기 힘들다

성토의 장으로 내몰린 그때의 인구정책은

나라의 위정자들의

머리 싸음으로 번지고 있다

소멸지역이 온 나라 전체로 빨갛게 물들이고

50년 지나면 현재의 3분의 1의 인구로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단 둥의

연구를 하는 요즘이다

"그때 막 낳아보라고 허재만은~"

그때의 인구정책에 미숙함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정답인가?

아내가 두 달이 넘어갈 즈음부터  아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들어올 때부터

소통에 자유롭지 못한 산소호흡기를

착용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오늘 죽는다고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정말로 오늘 죽었다

몇 번의 심폐 소생술로 생명이 소생하고

급기야는

목에 구멍을 뚫고 호흡기계가 침대에는 세팅되는

일이 입원의 첫 과정이 되었었다

말을 못 하니 소통은 자유롭지도 못했다

한여름이라서 응급실은 더워서 산사람도 죽을 맛이었다

등짝 이 침대에만 붙어 있으니 욕창도 생겨난다

무엇이 제일 중헌 지를 망각한 듯 욕창치료에 투입되는 간호사들~

화딱지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날 밤중에~

난리를 쳐댔다

술의 힘을 빌려서  했다

고래고래 고래처럼 소리를 질 렀다

"환자 곰방 죽어 가는데 의사는 뭐 하고 간호사는 신경도 안 써!!!

그러면 전공의들이 또 심폐소생술

그들은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는 없는 것처럼 산소포화도의 수치가 내리막을 그으면

그렇게 했었다

말로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지만 글을 써서 필요를 전달 했다  눈을 깜박임으로 내말을  이해했다는 의사를 표시하기도 하기도 했다

체크리스트 판을 준비하고 몇 장의 하얀 도화지를 끼워놓았다

거기에는 그날 그 시간의 아프고 있는 아내가 팔 요한 것들이 담기기 시작한다

이렇게 소통이 되니 한결 편했다

요구하는 아내나 그것을 해결해 줌으로 마음이 흡족해지는

내가 기뻤다

나도 할 수가 있구나

마지막이라고 수긍을 한 것 같으면서도

끈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아내의 필요에 화답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고마웠다

의지를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운 고마움으로 나를 붙잡아주었다

쓰인 체크 노트의 내용들은 대략 이렇다

"광주의 쌀패 친구 ( 깨복쟁이 친구라는 의미다 )

"용순이가 보고 잡어"

"산까치 엄마가 보고 싶어 오라고 해~"

이런 식의 명령을 받아도 기뻤다

'누룽지 과자가 먹고 싶다~"

참 이런 기막힌 현실이 을까~

난 이 글을 쓰는 내내 누룽지 사탕을 빨고 있네~

얼마 전 그러니까 십여 일 전에 사탕섭취의 중독성을 인식한 뒤부터는

등산이 나운동을 하지 않는 이상  사탕을 사는 일이 없는데

롯데 마트 쇼핑 카트에는 누룽지 사탕 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사탕을 먹으면서 쓰고 있다

사탕을 먹고 있으면 삶이 연장되고 있음을 알게 되어서일까

멀리 서울의 큰 처형은 소식을 받자마자  크나큰 봉지의 사탕 -누룽지사탕을

가방의 전부에 채우고는 내려오셨다

거의 하얀 종이에 버킷 리스트처럼 쓰이던 10월 초순 나는

급한 일로 집으로 와야만 했다

앞밭을 매수할 사람이 있다고 나의 사정을 염려하신  외삼촌은 나를 불 렀다

계약서를 쓰고는

 나는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가 허전했다

아직은 붙어 있는 가느다란 생명을 버킷리스트에 의지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떠보이고 그러면 눈떴다고 좋아하고 또 어떤 리스트를 요구할지를 두고

어떻게 그 요구에 합당한 답을 찾아줄 물음을 즐겨 기다렸는데 그 명령 같은 질문판이 없다

아니 아내의 생명인 버킷리스트가 없다

그것을 설명하고~

  해보고 싶다고~

  갖고 싶다고 ~

먹고 싶다고 지금까지의 가록이 없어졌다

아내가 생명처럼 여기고  우리 가족을 연결하고 기쁨을 공유하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면 녹을까 봐 서둘러 병실로 달려오던 내가

그리고 둘째 딸의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 병실에서 누가 함께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알리바이를 여기서 써도 되는지는 잘 모른다

그것은 나와 둘째 딸과 아내의 대학병원 중환자실 알리바이였다

그것이 없어졌다

생의 마지막을 붙잡던 애들 엄마의 애타도록 간절한 마지막 끈~

~~~ 하고 싶다의 마음이  어져 버렸다

하고 싶다는 자기의 욕망만이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이대목에서 글쓰기를 멈출 수도 있다

더 이상 내게 전달되지 못한 아내의 삶의 울림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움으로 추억할 뿐이었을 것이다

떨리는 아내의 가녀린 손이 바빴던 이유는 마지막 아내의 축복 기도 였다~

"세 딸들과 잘살아~"

내게 보낸 마지막 편지~

거기에 분명하게 아내가 누룽지 사탕을 빨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가느다란 눈으로 만족하는 표정을 보여야 하는데~

없다~ 나를 향해서 그리고 세 딸들에게 향해진 긴급하고도 비통한 유언장이 없어지니

나는 미칠 것 같았다

혹자는 그깟 일곱 자가 뭐 중요하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 아내의 기도문이고

작별인사라고 평범하게라도 이야기라도 하고 싶다

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간절함이 없어져버렸다

세상에 왔다가 세 딸을 낳아 키우던 엄마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생명처럼 붙잡았던 절절함을

누가 치워버렸다ㅡ담당간호사가 쓰레기통에 버렸을것같아서  쓰레기통 을뒤졌지만 못찾았다

"세 딸들과 잘살아~"

그것이 세상을 왔다가 간  아내의 알리바이~

내게 남긴 바람이었고 축복이었다~

티격태격했던 시간들의 따짐보다는 행복을 주문하고 떠나감에 대한 감사이다~

그래서 이 글은 하늘에 닿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다시 만나면 그때 미안했고 사랑한다고 처음으로 말해보고 싶다

말이 버벅 댈 수는 있겠다 생전에 해보지 않아서~

" 세 딸들과 행복하게 잘 살아~~~"

아내는 마지막 손의 힘을 상실함을 아는 듯  

힘들게 써주었다 체크리스트 그 하얀 종이에 누룽지 사탕과 아이스크림과

글씨는 잘 못쓴다는 말을 자주 했는 데 많은 버킷리스트 메모 중에서

유달리 또박또박한 글씨체를 남겨 놓았었다

나에게~

나는 이 글을 이제 마무리한다

더 이상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오늘 마감해 놓는다

그리고는 브런치의 서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다

나의 메모는 바라봄에 있다

그리고 사랍에 갇힌 모습과 해방되는 것도 매일반임을 강조한다

하늘에서 아내가 세 딸들과 잘 살아가고 있는 지를 말없이 투정 없이

그냥 보고만 있는 것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는 것- 편견과 선입견을 내 곁으로 인도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 이된 지도 꽤나 되었다

그동안 보기가 꺼려 졌던 앨범의 보자기를 풀어보니 아프기 한달전 계원들과

내가 빠진 제주도 여행 사진들이 많이도 남아 있다~

혹여 내 글이 서랍을 차고 나와  빛이 되는 날 마주하는 모든 이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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