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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에 Nov 27. 2023

[외국계 신입에게 고함] 5. 국어 반 영어 반

왜 영어를 그렇게나 섞어 쓰나

"차장님, 지난번에 보내줬던 data, simulation 끝났어요? due date가 금방이라 슬슬 draft 가 나와야 할 것 같아서요"

"네, almost 끝났어요. Quater별로 한 번만 더 보고 meeting invi 보낼게요"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슬며시 이야기한다. '조사만 빼고 거의 영어인 거 같아요. 하하'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영어를 많이 썼나 싶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뱉고 있는 말 중 많은 부분이 영어 단어로 채워져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내가 20여 년 전 처음 외국계 기업에 들어왔을 때 가장 놀랐던 부분이, 일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대화를 할 때 조사만 빼고는 거의 영어 단어로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었다. '외국계 다닌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좀 너무한데? 굳이 그렇게 영단어를 섞을 필요는 없잖아?' 했던 내가, 이제는 갓 들어온 신입 눈에도 영어 단어를 많이 섞어 쓰는 그 외국계 직장인이 되고 말았다. 


외국계 기업은 외국에 본사를 두고, 비즈니스의 확장 혹은 운영의 효율을 위해 한국에 진출하여 운영되고 있는 기업들이다. 기업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대부분 한국 법인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은 한국 사람들이고, 회의나 일상 대화는 한국말로 한다. 하지만 이메일, 발표자료, 보고서는 대부분 영어로 작성되며 이는, 본사에 있는 직원들이나 다른 나라에 위치해 있는 부서원들과의 원활한 소통 혹은 증빙(?) 자료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그러다 보니, 영어로 만들어진 발표 자료를 놓고 한국말로 발표를 하거나, 회의나 전화 통화는 한국말로 하고 최종 보고서/이메일은 영어로 보내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다 보니 이메일이나 자료에 쓰이는 영어 단어들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고, 그런 행동이 수년간 반복되다 보니 조사만 빼고 영어단어가 섞이는 대화가 습관으로 굳어져 버리게 마련이다. 

이는 다른 나라의 외국계 직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중국어를 사용하는 대만, 싱가포르, 중국 직원들이 먼저 회의를 하고 있을 때 가끔 자기들끼리 중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들도 대화의 반이 영어이기 때문에, 중국어를 못하는 나도 대충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중간에 동일 주제로 이야기를 끌어가면 서로들 재미있어서 한바탕 웃고 회의가 시작된 적도 많다. 


그러면 궁금할 테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려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하는가?

잘하면 잘할수록 좋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하지만 꼭 현지인처럼 잘할 필요는 없다. 글로벌 회사이나 보니 싱가포르 억양이 가득한 싱글리쉬, 인도 억양이 가득한 인글리쉬가 서로에게 익숙하고, 조금 문법이 깨져도 말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으니 Broken English free 존(완전한 free는 아니겠지만)이고 생각해도 된다. TV에 나오는 외국인 며느리들이 한국어를 더듬더듬 이야기해도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은가? 

영어로 온 이메일을 읽고 쓸 수 있으면 되고, 회의할 때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외국계 기업에서 커리어는 시작할 수 있다. 회의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전달하지 못했다면, 이메일로 정리해서 다시 보내줄 수 도 있고, 상대방이 했던 이야기를 잘 이해 못 했을 때는 '네가 한 이야기가 이 뜻이니?' 하고 다시 한번 물어 확인할 수 있는 용기만 있으면 될 것 같다. 


물론 외국계 기업에 입사한 이상 영어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직급이 높아질수록, 맡은 일이 많아질수록 영어 사용양이 기하 습수적으로 늘어나고, 영어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좀 더 논리적으로 상대방과 업무를 진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너무 두려워는 하지 말기 바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영어를 쓰고 그러다 보면 영어가 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나한테 '와 외국계 다니면 영어 잘하시겠어요?'라는 물음에 ' 전 Survival English 수준입니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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