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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버드 Aug 28. 2023

누가 괴롭히면 말해, 대신 쫓아다녀줄게.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파크 x단지 ㅁㅁㅁ동 ♧♧♧호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파크 x단지 ㅁㅁㅁ동 ♧♧♧호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파크 x단지 ㅁㅁㅁ동 ♧♧♧호...


할아버지는 왜 우편물 봉투에 적힌 집 주소를 몇 번이고 옆에 반복해서 적으셨을까. 치매 예방을 위해 쓰신 건가?



젊은 날 할아버지의 직장은 미군부대였다. 그래서 양파 가득 들어간 소불고기 못지않게 베이컨과 소시지를 좋아하셨다. 피자, 햄버거를 직접 사 드시는 신기한 할아버지였다. 이뻐하던 강아지에게도 치즈와 베이컨을 몰래 주다가 혼나곤 하셨다.


할아버지의 생활 반경은 과거로 가는 반직선 내에 있었다. 항상 가시는 곳은 집 앞 하나로마트, 근처 이발소, 코코와 산책하는 아파트 뒷산. 암 선고를 받은 이후 정기적으로 가시던 병원. 멀리 나가야 예전에 자주 다니셨던 산이나 미군부대 근처 가게 같은. 그 나이대 할아버지들이 으레 그렇듯, 크게 새로울 건 딱히 없었다.


집 앞 마트에서 장을 보시면 짐을 집으로 배송하는 서비스를 이용하곤 하셨다. 아마 배송지는 "여-기, x단지 ㅁㅁㅁ동 ♧♧♧호"라고 하셨겠지. 마트 바로 앞이니까 직원들도 다 알아 들었을 거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정식 주소'를 모르신 모양이다. 늘 머무는 곳이고 주소까지 알아야 할 새로울 일이 딱히 없어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틀 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휴대폰에 자동 통화 녹음 설정이 돼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떨리는 마음으로 재생하니 익숙한 할아버지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움도 잠시, 녹음 목록에 담긴 젊은 피자 배달 접수원의 퉁명스러움에 불쾌해졌다. 자꾸만 'x단지'라고 하는 할아버지께 무슨 x단지냐고, 모르시냐고 따지듯 물었다. 일을 열심히 하는 접수원으로서 당연히 물어야 할 말이다. 그런데 주소를 모르던 할아버지는 당황하셨고, 결국 그날 드시고 싶었던 피자를 못 드셨다.


접수원이 불쾌해서 눈물이 났다. 우리 할아버지 좀만 도와드리지, 사시는 곳이 어느 동네냐고. 내가 못 해 드린 건 생각도 안 하고 그 사람만 야속했다. 우편물에 적힌 주소를 외워낸 할아버지가 영리해서 울었다.


할아버지는 주소도 잘 모르는 집에서 어떤 노년의 삶을 보내셨을까. 답은 달력에 있었다. 은행에서 준 평범한 탁상형 달력이 할아버지의 짧은 일기이자 말년의 기록이었다. '왔다 감', '매봉산', 'coco와 산책'. 반복. 3개 국어긴 했지만 내용은 단조로웠다. 엄마와 이모들이 다가 갔고, 산에 가시거나 산책을 하셨다. 그리고 병원을 가셨다.


근데 내가 이렇게 적게 왔었나, 겨우 30분 거린데. 눈을 부릅 뜨고 찾아봐도 내 이름은 달력 몇 장을 넘겨야 한 번씩 나왔다. 점점 힘 없이 삐뚤빼뚤해지는 할아버지의 글씨체에 마음이 미어졌다. 맨날 말로만 사랑한다고 했지. 남겨진 자의 후회는 늘 이런 식이다.


학창 시절 나에게, 할아버지는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모아 용돈을 주셨다. 순대 사 먹으라고 주셨다. 할아버지는 베이컨은 먹어도 순대는 못 드셨다. 어린 내가 순대를 먹는 게 노인인 당신이 베이컨을 먹는 것보다 신기하셨나 보다.


어느 날은 가족들과 다 같이 뉴스를 보는데 학교폭력 관련 사회부 보도가 나왔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결연한 말투로 내게 말씀하셨다. 누가 괴롭히면 꼭 당신께 말하란다. 할아버지는 할 일이 없으니, 끝까지 쫓아가준다고 하셨다. 나는 웃겨서 웃었다. 어언 10년 전 일이다.


지금은 웃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본인의 단조로운 삶을 무기로 써서라도 나를 보호하려 해 주셨다. 할아버지와 내가 주고받은 애정에는 무게 차이가 너무 컸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단조로움을 깰 수 있었던 나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


2020년 8월 19일, 입원하시던 날 내가 보고 싶다고 우셨다 했다. 9월 5일 구순의 삶을 마무리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2주 동안 병원에 계실 때, 살아 평생 제일 자주 뵀다.


노인 한 분 안 계실 뿐이었는데 월드컵파크 x단지 ㅁㅁㅁ동 ♧♧♧호가 너무 휑해졌다. coco는 하루 종일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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