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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의 사소한 긁적임 Dec 05. 2023

귤, 그리고 캘리포니아 만다린

[글루틴 13기 챌린지] 겨울

11월 말부터 슬슬 영하로 떨어지더니 이제 정말 겨울인 12월이 되었다. 아침마다 호야를 산책시키는데, 이제는 잠옷 위에 후드 한 개로는 어림도 없고, 후드를 두 겹 입고 코트까지 입어야 한다. 주인이 옷 입는 걸 기다리는 호야 표정을 보면 참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 밖에 너무 추워서 그래, 조금만 기다려. 이 말을 알아듣는 듯이 호야는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지난 금요일에 남편과 크로거(미국 슈퍼마켓)로 장을 보러 갔는데, 큰 유리문 바로 앞에서 우리를 반겨준 것은 바로 귤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귤~!!!”이라는 한글말을 외치면서 다가갔는데, 이름은 귤이 아닌 “California Mandarin”이었다. 3파운드에 5달러 정도 하는, 엄청 저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비싸지는 않은 가격이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쟁여들였다.

귤인 척하는 놈

굉장한 기대감을 품고 집에 왔다. 손톱으로 꼭지 옆을 파고들어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는 그 행동을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캘리포니아 귤은 손톱 따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껍질이 오렌지만큼이나 너무 두꺼워, 나는 칼을 사용해서 귤이 아닌, 작은 오렌지의 껍질을 까야했다. 한국에서 먹던 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엄청난 실망감 이후로 따라온 건 귤과 연결된 기억들의 회상이었다.


매년 먹던 귤인지라 너무나도 많은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 존재할 터이지만, 희한하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친구와 대학생 때 겨울에 같이 올레길 걸으면서 제주도 여행했던 거였다. 하루에 그 긴 올레길을 걷는 게 참 힘들었기도 했을 텐데,  하루 종일 손이 노래질 때까지 귤을 먹었고 정말 귤 힘으로 버텼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올레길에 한 한적한 장소에서 조그마한 나무 의자 위에 귤 한 상자와 작은 나무바구니가 올려져 있었고, 이 글귀가 적혀있었다. 


“마음껏 드시고 원하시면 돈을 놓아주세요.”


왜 이게 그렇게 인상 깊었는지 모르겠다. 숙박비를 아끼려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자는 등 가난한 대학생이어서 그랬을까. 분명 세상은 각박하고 가차 없으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이 그랬건만, 이렇게 생전 모르는 남이 베푸는 정을 처음 봐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귤을 봉투에 담고 나와 친구는 오천 원 정도를 바구니에 놓았다. 그리고 푸근한 마음으로 귤을 먹으면서 올레길을 걸었다고 한다.


3년 정도 이후, 나는 지금은 남편이지만 그때 남자친구와 제주도에 여행을 갔었다. 임용고시 치고 나서 바로 

내려간 거라 마음이 싱숭생숭했지만, 참 재밌게 여행했다. 그때는 운전면허가 없어서 같이 뚜벅이 여행을 했는데, 정말 제주도 안에서 이동하는 시간이 참 길고도 길었다. 지내는 숙소에서마다 주인장님은 귤을 많이 챙겨주셨고, 버스 안에서 남자친구와 나는 귤을 까먹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그때 23살인 나와 26살인 남편은 귤을 누가 먼저 까나 레이스도 하고 서로 귤을 까주면서 굉장히 생색도 내고 그랬었다. 

23살의 나, 귤밭 옆에서

오늘 캘리포니아 만다린이라는 오렌지를 까면서 남편한테 툴툴댔다. 


“이거 귤 아니야. 이거 오렌지야.”


그랬더니 남편이 그랬다. 


“이거 한라봉이랑 조금 비슷한데?”

이 놈, 먹을 만하네.

다시 잘 살펴보니, 꼭지 부분이 위로 툭 튀어나와 있는 모양이 정말 한라봉이랑 비슷했다. 한라봉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귤에 대한 향수병이 나아지는 듯했다. 단단한 껍질을 까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맛을 보니, 오렌지와 귤을 섞어놓은 맛이었다. 껍질이 단단하다 보니 껍질에서 즙도 나오고, 조그마한 몸에 아주 큰 맛을 가지고 태어난 녀석이었다. 내가 두 번째 만다린 오렌지를 까는 모습을 보자, 남편이 물었다.


“다음에 또 살 거야?”


“응, 귤은 아니지만, 뭐, 이거 이번 겨울에 아주 많이 먹게 되겠는데.”


다음 주에 여행 갈 때 이 캘리포니아 만다린 6개 정도 챙겨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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