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오지 않을 십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갓 대학을 졸업하고 노량진에서 사경을 헤매다 나는 구원받았다. 그곳이 대안학교였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별 일이 있지 않고선 대안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아이들과 학교가 좋아 한 시간씩 일찍 출근했고, 아이들은 ’이렇게 즐거운 학교는 처음‘이라며 ‘매일 매일 다니고 싶다’고 했다. 일상은 믿기지 않는 꿈 속 같았다.
10여년 간, 이곳과의 인연은 질기고 애달프고 귀했다. 그리고 돌이켜보니, 내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기 위해 내가 ‘대안학교 교사’를 하게 된 것이라는 복선의 결말.
사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아이들은 그리 행복하지 못하다. 내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세상의 모든 부모님의 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현실은 그렇다. 일반 초중고에서 강사로 가끔씩 일해보는데, 숨막히는 분위기와 억압적인 관계들은 과거와 그리 다르지 않다. 더 마음 아픈 것은 그곳에서 의욕없는 아이들을 볼 때다. 그곳 어디에 희망이 남아있는 한걸까, 싶은 두려움이 느껴질때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학교의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이 행복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행정에 치인 교사, 변하지 않는 교육과 평가, 끝없는 경쟁과 입시전쟁, 쓸데없는 감정소모로 지친 관계들.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어서 조금 뜯어고쳐서 될 일이 아니다. 새로 시작하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좋은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과 즐겁게 다닐 수 있는 학교는 없는 것일까? 왕따도 폭력도 외로움도 아픔도 없이 행복한 학교는 불가능한걸까? 자신을 찾고 꿈을 꾸며 함께 걸어가는 학교는 있을까?
그래서 나는 굳이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런 행복한 학교가 곁에 있다면, 늦추는 만큼 손해인 것이 아닌가, 하고 남편과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아이가 완전히 결정을 내리는 것에는 시간이 걸렸다. 한 학기 동안 정이 든 친구들과 환경을 바꾼다는 것이 무리가 되는 일이었으니까.
‘굳이’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마음먹고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되는 한 여름 밤 고백이라든지, 사랑니 발치라든지, 내 아이와 대화하기처럼. 그렇게 ‘굳이’ 한 인생의 중대한 것들은 삶을 바꾼다. 내 옆에서 방학 숙제로 블로그 글쓰기를 하고는 좀 봐달라는 나의 아이처럼. 흥얼거리는 찬양 콧노래가 진심이라 졸린 오후를 흔든다.
글을 쓰다 아이에게 물었다. 일반학교에 다시 가게 된다면?
아이는 무덤덤하게 말한다.
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