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물었다,

오래전 죽어버린, 장자의 안부를,

by 식목제

오늘따라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형은 잘 있느냐고. 아버지는 8년 전 당신의 장자가 세상을 떠난 걸 잊은 듯했다. 그리고 그건, 아버지가 8년 만에 처음으로 물은 형에 대한 안부였다. 당신의 장자가 당신의 아내와 함께 있다는 걸 잊은 후에야, 아버지는 비로소 형에 대해 입을 뗄 수 있었던 거다. 잠시 눈동자가 흔들리던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잘 지낸다고. 형도, 누이도, 잘 지낸다고, 그이들의 자손들도, 당신의 손자들도 잘 지낸다고. 형 때문에 속상했던 마음은 이제 잊으라고. 다 지나가버린 일이지 않느냐고.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버지에게 물었다. “형하고 누나, 보고 싶으세요, 아버지? 한번 오라고 할까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이가 답했다. “번거롭게 할 것 없어.” “그 사람들 번거롭게 하는 것 말고, 아버지가 보고 싶으시냐고요.” 그러자, 아버지는 곧 입을 굳게 다물었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편의점을 찾은 한 아버지와 두 딸. 신이 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둘째 아이를 보며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쟤 어디 가는 거야?” 그러고는 큰아이에게 주문한다. “쟤 좀 어떻게 좀 해 봐.” 그러자 아이가 답한다. “내가 왜?” “네 동생이잖아!” 아이가 결정구를 던진다. “아빠 딸이잖아!” 나의 형이자, 아버지의 아들인 장자는 1968년에 존재하게 되었다가 2015년에 무화되어 비존재로 돌아갔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그이는 누구의 장자였고, 누구의 형이었고, 누구의 오라비였고, 누구의 남편이었고, 누구의 아비였고, 누구의 누구였다. 한 개체의 정체성은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 대개 무리를 이루어 사는 인간 종의 특성상, 사회적인 관계의 역학 속에서, 누구의 누구로 살며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해 나간다. 그런 까닭에 정체성은 특정 역할에 고정되지 않으며, 다채로운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편의점 안을 아무렇게나 뛰어다니는 작은 딸아이를 다독이고 통제해야 할 임무가 생겼을 때, 아버지와 큰아이가 서로에게 말한다. 네 동생이잖아! 아빠 딸이잖아! 실은 굉장히 철학적이고 중요한 질문을 서로에게 던진 셈이다. 가족이라는 사회적 역학관계 안에서 함께 관여하고 나누어야 할 역할과 책임에 대해 물은 것이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지만, 그 상황에서 아빠가 해야 할 일도, 언니가 해야 할 일도 있다. 물론, 상호작용하는 존재로서 둘째 딸이자 동생인 그 아이의 몫도 남아 있을 것이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형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장자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좌절된 욕망이 투사된 존재로서, 기대에 부응하는 장자였다. 명문대학에 합격하고서도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한 채 밥벌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는,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은 적이 없었음에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으며 마침내 명문 법대에 합격한 당신의 장자를 자랑스러워했다. 이제 욕망이 대물림되고, 당신의 장자는 결코 집안 형편 때문에 명문대 진학을 포기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해피 엔딩인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편의점에서 만난 큰 딸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정확히는 자원을 독차지하던 시절을 지나, 동생이라는 구체적인 경쟁자가 생긴 일을 받아들이고, 새로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는 법을 배워 나가야 한다. 또한 태어나자마자 강력한 경쟁자를 옆에 두고 사회적 역학관계를 배워 나가는 동생은 단 한 번도 사랑을, 자원을 독차지해 본 경험 없이 치열한 수싸움을 벌여 나가야 한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최초의, 최소한의 사회에 소속돼 어떤 구성원들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느냐에 따라 다채로운 경험을 하며 역동적인 관계 역학을 만들어 나간다.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형에게도, 누이에게도, 나에게도, 같은 과제가 부여되었지만, 우리는 이를 잘 수행해내지 못했다. 좌절된 욕망의 투사로서 장자의 명문대 합격은 전체 이야기의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실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그 작은 조각에만 매달리다 보면, 가족이라는 사회적 역학관계가 그려내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된다. 더 나쁘게는, 그 작은 조각이 균열을 일으켜 그림 전체를 산산이 부서뜨릴 수도 있다. 가족은 순백의 지고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이 아니다. 가족을 탄생시키는 사랑이 허상이라면, 가족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은 집단 내에서 각자 부여받은 역할과 책임을 두고 벌이는 사회적 연극과도 같다. 구성원이 가족 내에서 부여받은 페르소나를 조화롭게 잘 수행해 낼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가족으로서 괜찮은 가족사를 상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나의 원가족은 그러지 못했고, 모든 배우가 단 한 번도 합을 맞춰보지 못한 채, 연극이 지리멸렬하게 막을 내리는 중이다.


가끔은, 차라리, 일찍이 막을 내리고, 더 이상 이 가족사를 상연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삶이 주어지면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듯, 가족이 주어지면 어떻게든 가족사를 견뎌내야 한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무대 위에서 난장을 부리던 각 배우들이 이제 하나둘 떠나가는데, 난 공연히 비어 가는 무대를 서성이며 그이들을 생각한다. 지난겨울 마지막으로 만난 누이는, 더 이상 아비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동생이 아비에 대한 남은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마음을 조금 내려놓은 듯했다.


아무도 없는 객석과 텅 빈 무대 사이를 오가며, 조명도 들어오지 않는 무대 한구석에 누워 있는 아비를 본다. 어둡고, 추운, 무대 위에 누운 아비가, 서성이던 나를 바라보다, 문득 회한에 젖어 묻는다. “형은 잘 있어?” 어쩌면, 이제야, 당신의 장자에 대한 원망을, 욕망의 대물림을 완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당신 방식의 사랑을 이해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섭섭함을 내려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아버지는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끝내 당신의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들이었다는 생각이, 끝내 당신의 장자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아버지이지 못했다는 두려움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죽어버린 장자에 대해 단 한마디 꺼낼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형은 잘 있어요, 아버지. 걱정 마세요. 사랑하는 당신의 아내와, 사랑하는 당신의 아내와 빚은 장자가 함께 있어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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