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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young Dec 29. 2021

눈 앞의 나이


미확인 비행물체 3개가 떠다닌다. 교과서에서 본 XY염색체 모양과 비슷한 것이 가장 크다. 또 하나는 휴대용 반짇고리에 들어있는 아주 가느다란 실이 꽁꽁 엉켜서 매듭이 지어진 모양같다. 마지막 하나는 그라인더로 간 후춧가루 한 점 같다. 염색체와 매듭 사이는 가깝고 후춧가루는 홀로 조금 떨어져 있다. 셋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세트로 움직이는 것도 같다. 어쨌든 셋은 저마다의 궤도를 비행하고 있다.


어느 밤, TV 앞에서 발톱을 깎는데 눈 앞에 구스 패딩에서 삐져나온 것 같은 솜털 하나가 나타났다. 어, 이거 뭐야? 하면서 엄지와 검지를 집게 삼아 콕 잡으려고 하는데 잘 되지가 않았다. 여길 보면 여기 있고, 저길 보면 저기 있는데 도무지 집어낼 수가 없었다. 어, 이거 진짜 뭐지?


눈 앞에 실오라기나 거미줄 혹은 점 같은 것이 떠 다니는 것을 날파리증 혹은 비문증이라고 한다. 원인은 우리 눈 안에 유리처럼 투명한 유리체라는 조직이 있는데 이것에 변성이 생기면서 묽어지거나 섬유소 같은 것들이 서로 뭉쳐 실, 거미줄, 점 같이 보이게 된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현상이고, 저절로 없어지기도 하지만 계속 남기도 한다. 굳이 없애려면 수술을 하면 되지만 합병증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날파리증만 가지고 수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네이버 지식백과는 내가 목격한 미확인 비행물체가 외부 세계가 아닌 나의 내부를 둥둥 떠다니며 노화를 알리는 일종의 신호이자 병이라고 알려주었다. 앞으로는 항시 함께 할 테니 네 나이를 잊지도 부인도 말라는 뜻이었다.  


그랬다. 1년 전부터 주로 이마 위나 정수리 부근으로 게릴라처럼 출몰하는 흰 머리를 나는 가차 없이 제거해왔다. 팔자 주름 위에 다림질이라도 할 기세로 스틱형 밤을 꾹꾹 눌러 발랐고, 거칠어지고 갈라지는 발 뒤꿈치를 신형 각질 제거기로 부지런히 연마했다. 이것 말고도 차마 글로 적기 힘든 여러 개의 변화가 있었지만 딴청을 피우거나 모른 척을 하면서 내 몸 도처에서 날아온 신호를 무시했다. 어쩌면 그 중에는 최후 통첩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어제 출근 준비에 정신이 없는데 남편이 지나가듯이 말한다.  

“핸드폰을 하나 살까봐”

“그게 무슨 말이야. 얼마 전에 둘째 거 사지 않았어?”

“어머니 꺼 말야.”

“엥? 그럼 살까봐가 아니라 사드릴까봐 아니야? 말을 왜 그렇게 해? 누가 사드리지 말래?”

“…“


점심 시간을 1시간쯤 남겨두고 내 자리로 전화가 들어온다.

“정말 죄송합니다. 번역가한테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오늘 12시까지 드리기로 한 원고가 조금 늦어질 것 같아요”

“중간에서 그런 걸 챙겨주시는 게 통번역회사에서 해주시는 일 아닌가요? 무조건 더 당겨주세요”

“최대한 재촉해볼게요”

“저희도 광고주한테 보내주기로 약속한 시간이 있다고요.”

“…“


학교 끝나고 집에 왔을까 하며 그렇잖아도 막 둘째 생각을 하고 있는데 톡이 온다.

“엄마, 나 지금 집에 왔는데 피아노 가기 전까지만 친구랑 놀아도 돼?”

“내일 가져갈 영어 숙제는 다 해놨어?”

“놀고 와서 할게.”

“네 마음대로 해. 엄마는 책임 못 지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다 해”

“…“


그랬다. 나이가 들려거든 몸만 나이에 맞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나 마음도 지혜롭고 여유롭게 변해야 하거늘 오히려 날로 날카롭고 괴팍스러워지기만 했다. 이러니 싫어서가 아니라 민망하고 창피해서 사인들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벌써 10년은 된 거 같아요. 조금 불편하지만 적응하고 삽니다. 하지만 작은 스파크가 튀듯이 뭐가 번쩍 번쩍 하는 느낌이 들면 그 때는 위험신호예요. 바로 오셔야 합니다.”


  안과 선생님의 말이다. 그야말로 눈으로 먹고 사는 안과 의사 선생님도  미확인 비행물체, 아니 이젠 확인된 비행물체에 순응하며 산다는데 내가 어찌 감히 맞서 싸울까마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이들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미룰 때까지 미뤄야 한다.


요즘 특히 스트레스가 많고 잠을   자서 러는 거라고, 지금도 나는 염색체와 매듭, 후추가루  점이 사는 세계를 제거하기 위해 쌔게 눈을 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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